(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저는 39년 동안 기아(棄兒·버려진 아이)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프랑스로 해외 입양된 김유리 씨가 기자들 앞에 나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는 국가의 피해자들"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씨는 "저는 임시로 고아원에 어머니 의뢰로 맡겨졌고 어머니가 입양 동의서를 써준 적이 없다"며 "임시보호소에 맡겨졌다가 부모 몰래 해외로 팔려 간 입양인들을 강제 실종 피해자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는 과정에서 본래 신원과 가족 정보가 소실되거나 왜곡·허위 작성되고 해외 송출 후 적절한 보호조치가 이뤄지지 않는 등 인권 침해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6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은 내용이 담긴 '해외 입양 과정 인권 침해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화해위가 지난 2년 7개월간 조사한 결과, △허위 기아발견 신고 등 기록 조작 △적법한 입양 동의 부재 △의도적 신원 바꿔치기 △양부모 자격 부실 심사 △양부모 수요에 맞춘 아동 대량 송출 △입양 기부금 강제 징수 등 각종 인권 침해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례로 1976년 미혼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권 모 씨는 백부가 양육하다가 입양 알선기관에 입양 의뢰된 후, 엄 모 씨라는 다른 아동을 대신해 1977년 3월 15일 출국한 것으로 기재됐다.
엄 씨는 서울 노상에서 기아로 발견돼 고아 호적에 올려졌다가 해외 입양이 추진됐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이미 입양 수속이 완료 단계에 있었기에 당시 입양 알선기관이던 한국사회봉사회는 아동 신원을 바꿔치기하고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같이 아동이 출국을 앞두고 사망하거나 연고자가 아이를 되찾아가는 등 사유로 입양이 중단되는 경우 입양 알선기관이 새로 인수한 아동을 기존에 수속 진행 중이던 아동 신원으로 조작해 빠르게 출국시킨 사례가 빈번했다. 입양 취소에 따른 수수료 반환을 피하고 신규 아동 인수에 따른 행정 처리 등을 생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양부모 자격 심사도 부실하게 진행됐다. 1970년대 말 보건사회부 부녀아동과 및 해외이주국에서 근무한 전직 공무원은 "현실적으로 1년에 수천 건에 달하는 해외입양 아동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실제로 1984년 보건사회부에 접수된 해외입양에 의한 해외 이주 신청은 총 7964건으로 이 가운데 6599건(82.9%)는 신청 당일에, 1279건(16.1%)는 신청 다음 날 허가 처리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김 씨를 비롯해 한분영 씨와 피터 밀러 씨 등 해외 입양인 3명이 참석해 해외 입양 시스템 문제를 토로했다.
김 씨는 "제 친구는 1974년 홀트를 통해 프랑스로 입양됐는데 생후 5개월 아기일 때부터 10살 때까지 양아버지로부터 강간당했다"며 "한국의 해외 입양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주길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울먹거렸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전날 오후 열린 제102차 위원회에서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 신청인 56명에 대해 1차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다만 신청인 46명에 대해서는 자료 미비로 보류 결정이 나왔다.
해외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은 1964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해외 11개국으로 보내진 입양인 367명이 해외입양 과정에서 서류가 조작돼 정체성을 알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조사를 신청한 사건이다.
입양 국가별로 보면 신청인 가운데 61.9%(227명)가 덴마크로 입양돼 가장 많았고, 이어 미국 45명, 스웨덴 22명, 노르웨이 20명, 네덜란드·벨기에 각 17명, 호주 10명, 독일 5명, 프랑스 2명, 캐나다·룩셈부르크 각 1명 순으로 많았다.
진실화해위는 "수십 년간 잘못된 해외입양 관행이 유지돼 왔던 것은 국가가 입양인 등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야 할 책무를 방기한 것"이라며 △국가의 공식 사과 △입양인의 시민권 취득 여부 실태조사 및 후속대책 마련 △신원정보 조작 등 피해자에 대한 구제 조치 △입양 정보 제공 시스템 개선 △입양인 가족 상봉에 대한 실질적 지원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조속 비준 △입양 알선기관의 입양인 권리 회복 노력 등을 권고했다.
박선영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단지 지나간 아픔만 들춰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14만 명 이상의 해외 입양아들과 이들을 입양해 간 입양국들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입양아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 문제를 해결해 주며 다양한 교육과 취업의 기회도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후속 조치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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