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과 싸우는 젤렌스키의 모국어는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다. 심지어 두 사람은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다.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모국어는 러시아어다. 1978년 중부 도시 크리비리흐에서 러시아어를 쓰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우크라이나어를 배웠고 정치인이 되면서 우크라이나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개인 교사를 고용해 우크라이나어를 익혔지만 대선 때엔 우크라이나어 실력이 썩 좋지 못해 상대 후보로부터 조롱받기도 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인 드라마 '국민의 일꾼'에서도 그의 캐릭터는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또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에 거주하기도 했다. 젤렌스키는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19년 언론에 "우크라이나어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억양과 몇 가지 단어에 실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잘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원수지간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젤렌스키의 이름은 같다. 러시아어 블라디미르(Vladimir)와 우크라이나어 볼로디미르(Volodymyr)는 같은 슬라브어를 어원으로 갖고 있다. 블라드(vlad)는 '통치한다'는 뜻이며, 미르(mir)는 '세계' '평화'를 의미한다.
러시아에 맞서 지난 3여년간 필사의 항전을 이끌어온 젤렌스키의 모국어가 러시아어이고 두 정상의 이름이 같다는 것은 양국 역사가 그만큼 얽히고설켜 있단 것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기원은 러시아, 벨라루스와 같다.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9~13세기)'를 모체로 삼고 있다. 몽골 침공 이후 갈라졌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초에 짧게 독립 시기가 있었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등장하면서 그 일부가 됐다.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독립 국가가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인근의 서부 지역, 키이우에서 드니프로까지 이어지는 중부 지역 그리고 흑해 연안과 돈바스 지역으로 이뤄진 동부 및 남부 지역으로 나눠지는데 민족과 언어, 종교에서 다른 주민 집단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어는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 하르키우에선 가장 많이 쓰였고, 대중문화와 일상생활, 기업에서도 활용됐다.
냉전 시기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의 위상은 굳건했다. 소련의 15개 공화국 가운데 러시아에 이어 가장 인구가 많았다. 또 흑해 함대가 주둔하고 일부 핵무기를 보유해 군사적으로 중요했고, 농업 생산에서 큰 역할을 차지했다. 그래서 소련 붕괴 이후, 많은 러시아 정치인은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역사적 실수이고 봤다. 저명한 국제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는 제국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별 이후에도 긴밀한 관계는 이어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파이프라인에 의존해 중부 및 동유럽 고객에게 가스를 공급했다. 또 우크라이나엔 값싼 가스를 공급했다. 소련 붕괴 뒤 독립한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했고, 러시아는 이를 통해 역내 영향력을 유지했다. 소련 해체 뒤로 경제·군사적으로 국제적 지위의 하락을 겪은 러시아로서는 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중에서 서부 국경을 외세 침략에 맞서 가장 중요한 방어벽으로 여겼다.
하지만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2000년 대통령으로 처음 취임하고, 이듬해에 조지 부시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을 이끌고 미국을 이끌게 되면서 상황이 점차 달라졌다. 9·11 테러 직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러시아는 미국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원만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네오콘은 미국이 보다 적극적인 대외전략을 구사하고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는데, 강한 러시아 건설을 외치는 푸틴과 충돌했다.
특히,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국가에서 연이어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면서 러시아 앞마당에서 친러 세력은 약화했다. 2003년 조지아의 장미혁명과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으로 이어졌다. 푸틴은 색깔혁명의 배후에 서방 세력이 있다고 믿었다.
부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을 가속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가입을 추진했고,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하려 하며 푸틴의 목을 조였다. 러시아는 가스 공급 중단으로 맞서다, 2008년엔 친서방 노선을 추구하던 조지아를 침공해 5일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세력권 사수를 위해 무력 카드마저 불사한 것. 이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의 예고편이었다.
푸틴이 2007년 2월 뮌헨안보대화에서 작심한 듯 "나토 확장은 동맹 현대화나 유럽 안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상호 신뢰를 잠식하는 심각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서방은 냉전 종식 및 독일 통일 과정에서 소련에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겼다는 게 푸틴의 생각이다.

특히, 러시아가 세력권 중에서 핵심으로 여기는 우크라이나에선 서방과 러시아가 더욱 세게 부딪혔다. 2013년 11월 친러 대통령의 부패 규탄과 유럽연합(EU) 제휴협정 체결을 요구하며 시작된 유로마이단 운동으로 친러 정권은 붕괴했다. 시위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폭력적 양상을 띠었다.
정권 붕괴를 쿠데타라고 비난했던 러시아는 동부 친러 성향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용병을 보냈다. 또 혼란 속에서 2014년 3월 크림반도 병합을 선포했다. 돈바스 지역인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주 친러 반군들도 같은 해 4월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은 긴 내전을 벌였고, 급기야 러시아는 2022년 2월 전면 침공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돈바스 내전 휴전을 위해 두차례 민스크 협정이 체결됐지만 허사였다.
푸틴은 2021년 7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단일성에 대해'라는 5000 단어 에세이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역사와 문화,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고 인적으로도 연결돼 있다"고 격정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글은 분노에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반러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러시아로부터 분리됐기에 다시 결합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푸틴은 침공 직후, TV연설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에 "진정한 국가 지위"를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23년 12월 연례 연말 TV연설에선 "우리가 목적을 달성할 때 우크라이나에는 평화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와 비무장화 그리고 중립국화"를 들었는데 지금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라는 완충지대는 러시아 안보 확보의 필수조건이란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대만은 중국의 핵심 이익"이라며 국가 핵심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는 중국의 입장과 유사하다.
급기야 2020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러시아 연방은 국외 러시아 민족을 지킬 권리를 가지고 있고, 러시아에 편입된 이후엔 어떤 땅도 포기할 수 없다고 명기했다. 이후 러시아는 전쟁이 진행 중인 2022년 9월 30일, 우크라이나 4개 주(도네츠크, 헤르손, 루한스크주, 자포리자) 주변 지역의 합병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집착은 우크라이나가 가진 전략적 중요성, 서방 국가들에 대한 푸틴의 오랜 불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가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로 계속 발전하는 것을 푸틴이 두려워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러시아의 독재 체제가 허물어지고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하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2대 대통령을 지낸 레오니드 쿠치마는 2023년 12월 가디언에 푸틴의 목표는 땅을 점령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란 '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국가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해 러시아에 계속 의존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푸틴이 끔찍한 인적 손실과 평판 희생에도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역사는 짧고, 국토는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푸틴의 강공책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반러 감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됐지만 "진정한 국가 지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푸틴은 파탄한 우크라이나를 떠안으면서 질서를 바로 세우는 시나리오를 써봤을지 모르겠지만 오산인 셈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집요함을 감안하면 완충지대에 대한 푸틴의 집착을 멈추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러시아의 권력교체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러시아는 세계 2위 군사 강국이고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푸틴은 최장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그런 푸틴에 맞서 '최고의 협상가'를 자처하는 트럼프가 중재에 나선 종전협상이 진행 중이다. 하루라도 빨리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지만, 푸틴의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나니 예감이 썩 좋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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