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세상을 원망하랴 부모님을 원망하랴 자식들은 매일 같이 울고 있네…"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된 '제7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는 유해 발굴과 유전자 감식으로 75년 만에 만나게 된 한 가족의 사연이 소개돼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고(故) 김희숙 씨 가족의 사연이다.
제주시 한림읍 출신인 고인은 한여름이었던 1950년 7월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서귀포시에 있는 모슬포경찰서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네 살배기 아들을 둔 29살 청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는 제주도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예비검속을 벌이고 있었다. 예비검속은 '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을 뜻하는 말로, 당시 이승만 정부 내무부 치안국은 이른바 '요시찰인', '불순분자' 등을 구금과 학살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모슬포경찰서는 주로 4·3과 관련해 사상이 의심스럽다거나 가족 중 누군가 희생당했다는 이유를 들어 무고한 이들을 잡아들인 뒤 A·B·C·D등급으로 분류했는데, 이 중 C·D등급은 7월 16일과 8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에 넘겨졌다. 해병대는 그때마다 모슬포에서 총살을 집행했다. 희생된 사람만 217명에 달한다.
아들 김 씨는 아버지가 해당 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줄 알고 평생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매만지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리움에 사무쳐 살던 김 씨에게 지난 2월 갑자기 날아든 소식은 그야말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2007년과 2008년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부근에서 발굴된 유해의 신원이 아버지로 확인됐다는 소식이었다. 고인의 유해가 발굴된 곳은 과거 '정뜨르 비행장'으로 불리던 4·3 당시 최대 민간인 학살터 중 한 곳이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유전자 감식 결과였다. 자신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혈액이 신원 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됐기 때문이다. 김 씨의 아들은 가족 중 유일하게 채혈에 참여한 뒤 차분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 씨는 지난 25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행방불명 4·3 희생자 봉환식 및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75년 만에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고향 땅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정말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면서 눈물을 터트리며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소리쳤었다.
이날 추념식장에서 상영된 영상 속에서도 김 씨는 '세상을 원망하랴 부모님을 원망하랴 자식들은 매일 같이 울고 있네'라는 가사의 사부곡을 부르며 구슬피 울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단상에 오른 아들 김경현 씨는 "채혈 한 번의 결과로 할아버지 유해를 찾았고, 섯알오름이 아닌 제주공항에 묻혀 계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비로소 4·3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며 끝으로 아버지를 향해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은 뒤로 하고 남은 인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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