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71) 튀르키예 대통령은 집권 초기엔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국제적으로 개혁가로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1기 내각에서 부총리를 지낸 압뒬라티프 셰네르는 에르도안이 집권 초기 몇년은 자신의 기반을 벗어난 튀르키예인들의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각종 성과에 에르도안은 세 차례 연거푸 총선에서 승리하며 2014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4연임을 제한한 당규에 막히자 2014년 첫 직선제 대통령이 됐다. 2017년 정치 체제가 대통령제로 전환된 뒤 치러진 2018년과 2023년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집권 기간이 늘면서 그의 권위주의적 언행은 점차 노골화됐다. 2011년 AKP의 선거 승리 이후, 에르도안은 "엘리트의 폭정은 끝났다"며 본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내부의 반대 의견을 점점 더 용납하지 않는 모습은 2013년 게지 공원 시위에 대한 그의 대응에서 잘 드러났다. 공원 재개발 항의가 반정부 시위로 격화됐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진 시위에서 22명이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사망했고 약 5000명이 체포됐다. 2016년 쿠데타 실패 이후 대통령이 선포한 2년간의 비상사태에선 법관, 학자, 교사, 경찰, 공무원 16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고, 비판적인 언론 매체는 문을 닫았다.
에르도안 집권 초기에 튀르키예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기 위해 의회가 에르도안의 권력에 대한 여러 헌법적 견제 장치를 해제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 대통령제에 대해선 관료적 조정이 용이해지고, 번거로운 절차가 줄어들고, 의사 결정이 가속화되고, 경제적 안정성과 투자가 증가할 것이라며 국민들의 표를 받았는데 약속과 달리 에르도안의 권한만 커졌다.
그는 탄탄한 지지기반과 정치적 수완으로 각종 위기를 헤쳐나갔다. 한때 80%를 웃돈 인플레이션과 미 달러 대비 리라화 환율 급등(5년 간 리라 가치 474% 폭락), 시리아 중심으로 수백 만 난민 유입, 2013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부패 스캔들, 2016년 쿠데타, 5만 이상이 숨진 2023년 지진 등이 연이어 벌어졌지만 그는 선거에서 살아남았다. 위기에 위기를 만들어 대응하기도 했다.

국가 기관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견제 세력이 없다보니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했다. 2022년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세계적으로 물가가 급등했지만 에르도안은 도리어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금리 인상 요구엔 튀르키예 경제를 파괴하고 국가를 통제하려는 유대인 금융가들의 음모가 있다고 봤다. 그의 압박에 2018년 이후, 중앙은행 총재는 5번이나 바뀌었다. 저금리는 친정부 기업들이 위기를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됐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책에 튀르키예는 반으로 갈라졌고, 법치주의는 뒷걸음쳤다. 정경유착으로 행정권력이 시장의 승자를 결정하니, 국가경쟁력 하락은 당연했다. 민주주의는 완전 추락했다. 스웨덴에 있는 국제 연구 단체인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수준 지수에서 자유민주주의 지수는 0.24로 179개국 가운데 146위를, 언론자유는 0.15로 167위를 차지했다. 사법독립지수는 0.12로 전세계에서 바닥권이다. 튀르키예는 2010년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에서 2020년엔 '선거 권위주의(Electoral Autocracy)'로 분류가 바뀌었다.
에르도안은 또 다시 큰 위기와 마주 서 있다. 대선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을 웃도는 지지율을 받기도 하는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지난 3월, 부패 혐의와 국가안보 위반 혐의로 체포되면서 전국적으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거세지고 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이번 시위는 10년만에 최대 규모이다.
튀르키예의 다음 대선은 2028년 예정돼 있으나, 조기 대선이 열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 집권을 노리는 에르도안은 3연임 제한에 막혀 있는데, 그가 재출마를 위해 조기 대선을 실시해 한 번 더 출마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에르도안이 작정하고 '정적 죽이기'에 나설 수 있는 건 그에게 유리한 국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의 미국에선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마모을루의 체포에 대해 처음에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하칸 피단 튀르키예 외무장관에게 시위와 구금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을 정도다.
트럼프의 러시아 밀착 행보 때문에 불안감이 큰 유럽은 서방의 안보 구조에서 튀르키예를 핵심 플레이어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에르도안과 부딪히는 일은 가급적 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튀르키예 야권 분열 조짐도 에르도안에겐 호재다.
튀르키예의 한 언론인은 다음 선거까지 최장 3년이 남은 상황에서 에르도안은 투표일 전까지 경제 피해는 복구될 것이고, 이마모을루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결국 사라질 것으로 믿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승부에서 에르도안은 또 다시 웃을 수 있고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환호할 수 있다. 하지만 편가르기와 소수자 배제에 따른 내부 갈등, 삼권분립 약화라는 민주주의 후퇴, 왜곡된 국가자원 분배, 권위적 통치와 전횡이라는 포퓰리즘 정치가 튀르키예에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어졌다. 포퓰리즘 정치는 시민의 참여가 확대되는 대중민주주의가 절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의 기본 덕목은 국민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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