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1) 김승준 기자 =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자동차, 지능형 로봇 등 미래 혁신 산업은 반도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경제·안보 양측에 중요성이 커진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고 미국, 중국, 일본 등 경쟁국은 거액의 직접 보조금을 뿌려가며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한국도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K-칩스법'을 마련, 국회에서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주52시간 연구·개발(R&D) 노동 시간 규제 논란'에 막혀 8개월째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22일 국회에 따르면 지난 20일 열린 여야정 국정협의체에 반도체 특별법이 의제로 올랐으나,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미국·일본의 반도체 첨단 인력들은 근로 시간 제약 없이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며 "현재 제도로는 집중근무가 어려워 연구 단절이 발생하고 수요기업 발주에도 즉시 대응이 어렵다. 이것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반도체 특별법'이 아니라 '반도체 보통법'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근로 시간 특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낫지 않냐고 하는데, 여기에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할 수 있는 지원 정책을 그것 때문에 안 할 이유는 없다. 패키지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여당과 야당의 이견만 재확인한 수준에서 반도체특별법 합의는 결국 또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해 6월 19일 22대 국회 최초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안'(고동진 국민의힘 의원 안)이 발의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반도체 산업 지원 특별법안은 다수 발의됐으나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위원회의 소위원회도 통과하지 못한 상황이다. 산중위에 계류 중인 반도체 산업 지원 특별법은 현재 총 9개다.
9개 법안의 주요 내용은 유사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에 필요한 인허가나 용수, 전력 공급 등 기반 시설에 필요한 인허가 절차를 완화하고 전력 요금 인하, 세제 지원, R&D 사업 강화, 인재 양성 지원, 정부 내 거버넌스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논의에서 쟁점이 생긴 사항은 '52시간 노동 규제 예외'와 '직접 보조금'이다.
여야 견해차가 큰 52시간 노동시간 예외 규정은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 안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가 2024년 11월 당론으로 발의된 이철규 의원 안에 포함됐다.
정부와 여당은 기술 확보에는 연구·개발(R&D) 인력에만 노동 규제 완화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고 야당은 예외 적용에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니 별도 처리하자고 맞서고 있다. 기업 측에서는 정부, 여당과 유사한 입장이며 노동계는 과로 우려와 장기적인 R&D 연속성을 해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미국은 화이트칼라 이그잼션,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 대만은 노사협의를 통한 근로 시간 연장 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직접 보조금 문제는 현재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지만 처음에는 정부·여당 내에서도 이견이 나왔다. 가장 먼저 발의된 고동진 의원 안에서는 반도체 클러스터, 인력 고용 보조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박수영·송석준 의원 안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직접 보조금 조항을 두고 정부에서 금융지원, 세액 공제 등 간접 지원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재정 당국은 대기업 지원이 국민 정서에 반할 수 있다는 점과 세계무역기구(WTO) 보조금 협정 위반 우려를 들어 난색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여당은 "보조금 등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수준으로 법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정책 금융을 강화해 보조금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쪽으로 발의 법안을 냈지만, 재정 지원 필요성에 여당과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다.
일단 국회는 이와 별도로 반도체 기업의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 18일 기획재정위원회에서는 통합 투자 세액공제율을 현행 대비 5%P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 일부 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 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세액 공제율은 대·중견기업 20%, 중소기업 30%로 올라간다.
반면 미국, 일본, 중국에서는 대규모 보조금 투입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2022년 칩스(CHIPS)법을 통해 약 390억 달러 규모의 직접 보조금을 도입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 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 22일 기준 325억 달러(56조 1576억 원)의 보조금과 최대 55억 달러(7조 9202억 원)의 대출이 32개 기업의 48개 프로젝트에 걸쳐 23개 주에 지원됐다. 인텔은 78억 6500만 달러(11조 3259억 원)의 직접 지원이 확정된 상태다. 이외에도 인텔은 100억 달러(14조 4000억 원)의 저리 대출 지원도 받았다.
일본도 반도체 생산 기반을 강화하려 직접 보조금 정책을 대규모로 펼치고 있다. 2023년 롬(Rohm), 도시바(Toshiba)에 1294억 엔(1조 2273억 원)의 보조금이 들어갔고 2024년에는 라피더스(Rapidus)에 5900억 엔(5조 5958억 원)의 보조금이 결정됐다. 2025년에는 라피더스에 1000억 엔(9481억 원)의 추가 지원이 추진 중이다.
반도체 굴기를 국가적 과제로 추진한 중국도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대응해 주요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빅 펀드'라는 국가 반도체 산업 투자 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데 2024년 3차 펀드 조성에 475억 달러(68조 3995억 원) 규모의 자금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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