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윤다정 노선웅 홍유진 기자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부당하게 관여한 혐의 등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심에서도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부터 9년 5개월, 재판에 넘겨진 지 4년 5개월 만이다.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백강진 김선희 이인수)는 이날 오후 2시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과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실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등 14명에 대한 검찰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1360쪽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내고 증거 2000개를 새로 제출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를 일부 인정한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을 반영, 예비적 공소사실을 추가해 이 회장의 공소장을 일부 변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1심 결론이 2심에서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검찰이 주장한 이 회장의 19개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먼저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 압수수색 당시 검찰이 확보한 서버 △이른바 '장충기 문자' △삼성에피스 직원의 외장하드 등 1·2심에서 제출된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사회 결의 및 합병 단계에서 미전실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이 회장에게 유리한 합병 비율·시점을 선택해 결정하고 합병 목적, 경위, 효과 등을 허위로 공표했다는 검찰 측 주장도 "합리적 의심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삼성물산 내 '합병TF' 문서에 적시된 '합병 시너지 60조 원' 기대효과 부분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양사가 중장기산업계획에서 예상한 매출액을 단순 합산해 합병 후 매출액 목표로 설정한 것으로 허위라 할 수 없다고 봤다.
1심 재판부가 2019년 국정농단 의혹 관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검찰 항소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건 합병에 이 회장의 지배권 강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삼성물산이 사업성 목적이 지배력 강화와 대립·상충되지 않고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9년 8월 "최소 비용으로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한 이재용의 지배권 강화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미전실을 중심으로 삼성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승계작업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합병 비율 및 시점과 관련해서도 "미전실이 2011년 이래 합병을 검토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며 부정한 수단이 추가 결합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합병비율 적정성 검토보고서에 부당한 가이드라인이 작용해 조작됐다고 할 수 없다고 봤다.

주주총회 승인 단계에서 △합병 성사를 위해 삼성물산이 KCC에 자기주식을 매각한 것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발생 위험 미고지 등도 부정하다고 할 수 없으며 △합병 관련 정보 유포 △용인 에버랜드 개발 계획 공표 등을 허위로 볼 수 없다고도 판단했다.
여기에 △국민연금에 대한 합병 찬성 설득은 통상적 IR 범위 내에 있고 찬성 의결권 행사를 유도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PB들이 조직적으로 삼성물산 주주들의 의결권 확보를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주주총회 이후 주식매수청구기간 중 제일모직 자기주식 집중 매입을 통해 주가관리를 한 것 역시 시세조작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삼성바이오 2015년 회계연도 분식 회계 혐의와 관련해서는 "판단에 이르는 근거와 과정에 최소한의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2014년 회계연도 분식 회계 혐의에 대해서는 "공시 내용이 다소 미흡한 사실은 인정되나 과실을 넘어 고의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증명이 부족하다"고 배척했다.
검찰은 모회사인 제일모직 주가 악영향을 우려해 삼성바이오 2014년 회계연도 공시 중 에피스와 다국적 제약사 바이오젠 사이 합작계약의 콜옵션 등 주요 사항을 은폐했고, 2015년 합병 여파로 삼바가 자본잠식 위험에 처하자 회계처리 방식을 '지분법'으로 바꿔 기업 자산가치를 부풀렸다고 봤다.

이날 이 회장은 출석 및 퇴장 과정에서 모두 침묵을 지켰다. 800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1시간 가까이 읽어 내려가는 동안 수 차례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지만, 대부분 표정 변화 없이 정면을 바라봤다.
다만 무죄 선고 직후 재판부가 퇴정한 뒤에는 옆자리에 앉은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과 대화를 나누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과 김종중 전 사장과도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이 회장 측 변호인단은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재판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면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정말 긴 시간이 지났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피고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 회장은 경영권 승계와 그룹 지배력 강화를 위해 그룹 미래전략실 주도하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부당하게 추진·계획하고, 제일모직 자회사였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4조 5000억 원대 분식 회계에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검찰은 삼성그룹이 '프로젝트-G(Governance·지배구조) 승계계획안'을 짜고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작업을 실행했다고 봤다.
이 회장과 미래전략실이 삼성물산에 불이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합병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또 합병 단계에서는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허위 호재 공표, 시세 조종, 거짓 공시 등을 주도했다고도 봤다.
지난해 11월 열린 2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 회장에게 1심 구형량과 동일한 징역 5년, 벌금 5억 원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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