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신기림 기자 = 독일 의회가 향후 10년 동안 1조 유로(약 1590조 원) 이상의 국방·인프라 지출안을 승인하며 '현금 바주카포'를 쏘아 올릴 준비를 마쳤다. 차기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막대한 재정 지출안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유로존 최대 경제국 "독일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독일 연방 하원은 18일(현지시간) 국방과 인프라에 1조 유로 넘는 자금을 쏟아 붓는 내용의 지출안을 찬성 513표, 반대 207표로 승인했다.
이번 지출안은 국내총생산(GDP) 1%를 초과하는 국방비 지출은 '부채 브레이크' 규정의 예외를 적용하고 10~12년에 걸쳐 인프라에 5000억 유로(약 794조 원)를 투자하는 기금을 마련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인프라 투자 규모는 5000억 유로, 나머지 국방 지출은 잠정적으로 5000억 유로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원이 기본법(헌법)상 부채 브레이크(신규 부채를 국내총생산의 0.35% 이하로 제한)를 풀면서 전범국 독일은 군비 지출을 위한 재정적 족쇄를 해제했다. 이번 투표에는 헌법상 부채 브레이크 해제를 위해 필요한 정족수(3분의2) 이상의 찬성표가 나왔다.
이에 따라 독일의 대규모 국방비 지출 계획에 있어 차입 규제 상한선이 없어졌다. 독일 언론들은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재정안에 대해 "XXL 사이즈의 현금 바주카포"라고 불렀다.
이번 법안은 21일 상원 승인도 필요하지만 반대가 우려됐던 바이에른 자유당이 동의하며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25일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의회의 소수 정당들이 이번 법안을 부결시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메르츠 차기 총리는 일정을 앞당겨 법안을 표결에 부쳤다.
메르츠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상황을 언급하며 신속한 법안 처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자주국방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 방위의 최전선인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와 밀착한 반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 방위에 대한 약한 의지를 드러내며 유럽은 안보 불안이 심해졌다.
메르츠는 투표에 앞서 의원들에게 "우리는 적어도 10년 동안 잘못된 안정감을 느꼈다"며 러시아의 공격은 "우크라이나 영토만이 아니라 유럽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국방준비 태세에 관한 우리의 결정으로 독일이 돌아왔다. 새로운 유럽 방위 공동체로의 첫 번째 중요한 단계가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동맹국들은 이번 소식에 환영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독일 의회의 결정에 "훌륭한 소식"이라고 칭찬하며 "독일이 방위에 막대한 투자의지를 유럽 전체에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X에 독일이 "공동 안보에 대한 리더십과 헌신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썼다. 독일을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과 유럽에 좋은 소식인 연방하원의 역사적인 투표"를 축하했다.

독일은 국방력 강화뿐 아니라 수십 년 간의 재정적 보수주의를 버리고 쏘아 올린 재정 바주카포를 통해 침체에 빠진 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도이체방크의 로빈 윙클러 수석 독일 이코노미스트는 "역사적 재정체제 전환으로 독일 통일 이후 가장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건설 부문은 낙후한 독일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한 기금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으며, 방위 산업도 혜택을 볼 것으로 보인다.
하우크 아우프호이저 람페 은행의 알렉산더 크루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에 "재정 바주카포의 전망이 시장 기대치를 끌어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DIW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인프라 펀드만으로도 향후 10년 동안 경제 생산량을 매년 평균 2% 이상 늘릴 수 있다. DIW는 국방 및 인프라 지출 확대에 대한 합의로 2026년 성장률을 기존의 1.1%에서 2.1%로 높여 잡았다.
독일이 더 많은 부채를 떠안게 되지만 미국, 프랑스와 같은 다른 주요 선진국보다 낮은 부채비율로 국가 신용을 위협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코메르츠방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요르그 크라머는 인프라를 위한 새로운 특별 기금만으로도 향후 몇 년 동안 독일의 부채비율은 약 10% 포인트 정도 눈에 띄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부채비율이 높아지겠지만 최고 수준인 독일의 국가신용이 즉각 강등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스코프의 에이코 시버트 애널리스트는 독일의 GDP 대비 부채수준이 현재 64%에서 2029년 72%까지 오를 수 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부채수준이 80%까지 올랐던 2010년에도 독일은 AAA라는 최고 국가신용 등급을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 관료주의를 축소하는 등 추가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제 신용평가업체 피치는 막대한 재정지출이 지속적 성장개선을 유발하지 못하면 독일의 AAA 등급이 장기적으로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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