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현시내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2022년 5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아들 "봉봉"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이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와 한 팀으로 대선에 출마해 승리한다. 2024년 2월에는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 위도도의 아들 기브란 라까부밍 라까가 이전 대선에서 아버지와 치열하게 경쟁했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와 대선에 도전하여 부통령으로 당선된다. 프라보워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장기간 독재를 한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위였고, 1998년 5월 민주화 항쟁 폭력 진압을 진두지휘한 군사령관이었다. 2024년 8월 태국에서는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퇴출당했었던 탁신 친나왓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다.
몇몇 정치평론가들은 동남아시아에서 독재자의 후손이 정권을 잡는 현상을 전제 정치(autocracy)의 귀환이라고 본다. 그 원인 중 하나로는 최근 동남아시아 정치·경제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중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테르테 정권이 전통적인 친미 동맹을 벗어나 중국과의 외교적, 경제적 관계를 다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미·중 대결의 심화가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의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기 독재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희생하며 민주화를 이룩해 낸 나라에 왜 독재자의 후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일까?
동남아시아에서 독재자의 후손에 대한 대중적 지지 강화라는 현상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정치 가문(政治家門)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계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1997년과 2008년의 경제위기를 겪으며 냉전 시기 개발 독재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에서는 소위 "황금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절이 회자되었고, 이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박정희와 같이 미국의 해외 원조로 막대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친미 개발 독재자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필리핀의 경우 아이러니하게, 이전 두테르테 대통령의 막대한 인권탄압으로 인해 아버지 마르코스 시절의 고문, 암살, 공포정치가 잊히게 된다. 대선 기간 봉봉 마르코스는 아버지와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필리핀 전통의상을 입고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었던 신사회 정권이야말로 필리핀의 황금시대라고 주장하며 민심을 얻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장기 독재의 기억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팽배하게 된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은 다당제와 선거를 꾸준히 이어 왔고, 선출된 권력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다. 장기 독재에 저항한 이들이 고문, 구금, 행방불명 등으로 사라져 저항의 흔적이 흩어지니 독재의 역사가 겉으로는 평화와 안정의 시간처럼 보인다.
게다가 탁신과 두테르테처럼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벌건 대낮에 어린아이가 길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공포정치를 행한 나라에서는 강한 지도자에 대한 두려움과 열망이 공존하게 된다. 즉, 독재의 그림자가 긴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안정적 유지가 강한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고, 그의 후손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의 후손들이 약속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은 요원하다. 최근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과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간의 갈등이 부통령 탄핵으로 귀결되고, 마치 예정된 것처럼 3월 11일 아버지 두테르테가 국제형사재판소로 압송되면서 필리핀 정계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비교적 민주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던 조코 위도도가 독재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인 프라보워와 손을 잡고 아들을 부통령으로 만든 데에 대해서 인도네시아 진보세력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이들 간의 동맹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커지고 있다.
거의 15년간 자발적 망명 생활을 하던 탁신 친나왓이 자기 여동생 잉락 친나왓과 막내딸 패통탄을 총리로 만든 저력을 앞세워 태국으로 귀환하자 조심스럽게 쿠데타의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전제 정치로의 귀환이 설명하지 못하는 정치 가문의 부활이 끌어낸 현재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신의 근원은 먼저 정치적 금수저들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실패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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