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 3000켤레의 구두로 남은 여자, 이멜다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65년 필리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장기 집권했던 마르코스의 부인 말이다. 이멜다가 소장했던 보석 컬렉션도 760여 점이었다고 하니 '사치의 여왕'이란 별명도 괜한 말이 아니다.
현재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들의 아들이다. 민중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사람의 아들이 다시 대통령이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필리핀과 우리나라는 상당히 비슷한 현대사의 궤적을 그렸다. 정치의 영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고나 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과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시기도 그렇고, 영구 집권을 노려 헌법을 뜯어고친 때도 비슷하다.
게다가 자식들이 아비의 후광으로 정권을 잡았던 것까지 판박이다. 단지 한 사람은 측근의 총탄에 암살되었고, 다른 사람은 망명이라는 정치적 암살을 당했다는 최후만 다를 뿐이다.
1965년 권좌에 오른 마르코스는 집권 초기엔 민주적 정책을 펴고 경제를 일으켰으며 실리적인 외교 노선을 선택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바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1972년 '공산주의의 위협과 사회적 갈등의 심화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계엄을 선포했고, 1973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하면서 독재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부인과 친인척을 정부 요직에 앉히며 족벌 체제를 구축했고, 가차 없는 민중 탄압과 권력 남용으로 악명을 날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선진국'으로 꼽혔던 필리핀의 국부(國富)를 마르코스는 알뜰하게 탕진했다.
마르코스가 획책한 계엄이라는 기관차는 독재란 종착역으로 폭주했지만, 민심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종신 대통령이 되겠다며 몰아붙인 1986년 선거는 외려 민중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필리핀 의회는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고, 가톨릭 주교단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역사를 바꾸는 20일간의 성전(聖戰)'이 막을 올렸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민중의 항쟁은 탈냉전 시대 거세게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망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걸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당시의 치열했던 민주화의 성전은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필리핀 전역에 전해졌다. 그때 그 라디오 방송의 자료가 200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마닐라 외곽의 천주교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베리타스'와 마닐라 시내의 '라자 방송', 퀘존시 민영 방송사 '라디오 반디도', 국영 방송사 '보이스 오브 필리핀' 등이 송출한 당시의 긴박한 방송 실황 녹음이다.
항쟁의 한가운데서 4일간 중단 없이 지속된 61시간 33분 분량의 카세트테이프 44개와 25분 분량의 소형 디스크 1개 방송분이다. 여러 지역의 라디오 방송이 함께 들어간 것은 시민들의 긴밀한 연대가 항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 말해준다. 세계기록유산 지정은 시위의 주도자, 반군, 곳곳에서 농성을 지속하던 대중을 연결하는 필수 소통 매체이자 기록물로서 라디오 방송이 언론의 제 역할을 다했음을 추인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21년간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쫓겨난 지 39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1986년 피플파워는 단지 시작이며, 여전히 진행형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민주화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어떠한가? 광장의 깃발이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면 언제라도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도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가문의 부활'을 외쳤지만 '독재의 유령'이라는 역풍에 직면했던 마르코스 주니어가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이자 현 부통령인 사라 두테르테의 협력 덕분이다.
그런데 마르코스는 2025년 1월 3일 두테르테를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전격 축출했다. 앞서 두테르테는 자신이 암살될 위험에 처했다고 호소하면서 보복으로 대통령을 암살할 수도 있다고 권력 갈등을 언급한 바 있다.
하나의 권좌에 둘이 앉는 정치는 가당치 않은 걸까? 필리핀의 피플파워 세계기록유산이 민의와 연대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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