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뉴스1) 김민수 이강 기자 = 새까맣게 타버린 집에서 자재들이 부딪치면서 굉음을 만들어냈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가재도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29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 창길3리에 위치해 있는 정준영 씨(76·남)의 집은 마치 흑백 영화와 같았다. 초록빛 지붕은 잿빛에 삼켜졌고, 바닥은 검게 탄 상태였다. 불에 그을린 집에서 유일하게 색을 지닌 것은 열기에 녹아내린 붉은색 페인트통뿐이었다.
정 씨는 은퇴 후 생활을 꿈꾸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이 집을 6년 동안 지어왔다. 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집이 불타버리자 정 씨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 차마 못 있겠더라"며 임시대피소에서 안양으로 올라갔다.
정 씨는 "한 달만 공사를 했으면 이제 입주할 수 있었는데 난감하다"며 "희망이 없어진 것만 같다"고 말끝을 흐렸다.
경북 의성군에서 처음 시작된 대형 산불 주불이 진화됐지만, 피해를 본 주민들은 피해복구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방문한 정 씨의 은퇴 후 보금자리는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창문은 그을린 채로 뻥 뚫려 있었고, 매캐한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집 앞에는 1000평에 달하는 자두밭도 자리하고 있지만, 화마가 할퀴고 지나가면서 올여름 열매가 맺히길 기다렸을 나무들은 바싹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정 씨는 "아직 복구 등을 포함해 계획이 잡힌 게 없다"며 "지금은 손도 못 대는 상황이고, 가족과 뒷일을 논의하고자 안양에 머물고 있다"고 힘없이 말했다.
정 씨의 이웃인 신해진 씨(64·남)도 정 씨가 공들여 지은 집이 하루아침에 불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이장과 면사무소 관계자가 정 씨의 집을 찾았다. 마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러 나온 이들은 안타까운 눈길로 정 씨의 집과 자두밭을 구석구석 살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오늘부터 피해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며 아직 구체적인 복구 계획은 미정이라고 했다.

산불로 최근 전소된 '천년고찰' 고운사 인근인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또한 피해가 컸다.
마을 곳곳에선 불에 탄 채로 벌판에 덩그러니 방치된 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들은 골격만 앙상하게 유지한 채였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은 잿더미와 잔해로 넘실거렸다.
이날 구계2리에서 만난 주민 김광필 씨(72·남)는 새까맣게 탄 집 앞에서 나무를 심고 있었다. 약 120평 규모인 김 씨의 집과 창고는 산불로 인해 집 골격이 기괴하게 뒤틀려있었다.
김 씨는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중"이라고 했다.
복구 계획을 묻자 김 씨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며 "면 차원에서 피해복구를 지원한다는 말이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2일부터 경북 의성에서 시작해 북부·동해안을 덮친 산불로 총 26명이 숨졌다.
전날 오후 주불 진화가 완료된 의성, 안동, 청송, 영양에서 밤사이 부분적으로 연기와 크고 작은 잔불이 발생해 이날 오전 7시부터 헬기 30대를 투입하고, 인력 2000여 명을 투입해 잔불 진화를 하고 있다.
이날 오후 경북지역의 산불로 인한 피해 영향 구역은 4만 4000㏊로 서울 여의도(290㏊)의 151배에 달하며, 지역별로 의성 1만2821㏊, 안동 9896㏊, 청송 9320㏊, 영덕 8050㏊, 영양 5070㏊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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