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홍콩과 싱가포르는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아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두 도시는 19세기 초중반 영국에 의해 건설된 식민지 항구 도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도시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중국계 이주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영국령이었던 근대부터 현재까지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는 점도 두 도시의 중요한 공통점이다. 반면 차이점도 뚜렷하다. 홍콩은 중국 대륙의 관문 역할을 하지만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관문 역할을 한다. 그리고 홍콩은 광둥 출신 화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싱가포르는 푸젠계 화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차이가 있는데, 홍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령으로 남았다가 현재 중국의 '일국양제' 체제 아래 편입되는 과정에 있는 반면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했다가 이후 독립해 도시국가로서의 국체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200여 년을 이어온 두 도시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사실은 금융 중심지로서 홍콩이 항상 싱가포르에 앞서 왔다는 점이다.
그러다 최근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싱가포르가 홍콩을 대체할 아시아의 글로벌 금융 허브로 새삼스레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팬데믹과 홍콩에서의 정치적 격변이 중요한 분수령이라 여겨지는데, 모든 지표에서 싱가포르가 홍콩을 앞서거나 따라잡는 추세가 뚜렷하다. 그 결과 지난 2023년 5월 11일 자 이코노미스트지는 글로벌 금융 허브로서의 경쟁력에서 싱가포르가 드디어 홍콩을 넘어섰다는 기사를 내기에 이르렀다("A winner has emerged in the old rivalry between Singapore and Hong Kong"). 경제 성장률, 금융 경쟁력, 외국인 투자 유치, 자산 운용 규모 등의 다양한 지표에서 싱가포르의 강세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서의 입지 변화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국내총생산(GDP)은 5014억 달러로, 홍콩의 3820억 달러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싱가포르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3~4%의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반면 홍콩은 2020년 이후 정치적 불안정성과 인구 유출 등의 영향으로 경제 성장률이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홍콩은 2019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 이후 글로벌 기업과 자본이 일부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경제 성장 속도가 둔화됐다. 또한 싱가포르는 금융 경쟁력 면에서도 홍콩을 앞서고 있다. 2023년 글로벌 금융 센터 지수(GFCI)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뉴욕과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금융 중심지로 선정되었다. 반면 홍콩은 4위 또는 5위권으로 순위가 하락했다. 홍콩은 여전히 중국 본토와의 강한 연계를 바탕으로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정치적 불확실성과 규제 변화로 인해 금융 중심지로서의 매력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법률 시스템과 친기업적인 금융 정책을 통해 글로벌 금융 기업들의 선호도를 높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정치권의 의지가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 운용 부문에서도 싱가포르는 홍콩을 추월하는 모습을 보인다. 2023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총 운용 자산은 5조4070억 싱가포르 달러(약 5819조 원)에 달하며, 연평균 10%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유입되는 자금 비중이 높은데, 전체 자산 운용의 77%가 해외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홍콩의 2024년 기준 총 운용 자산은 3조9700억 미국 달러(약 5630조 원)로, 전년 대비 2.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홍콩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중요한 금융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으나, 정치적 불확실성과 함께 글로벌 금융 기업들이 점차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약화할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지표는 소위 패밀리 비즈니스라 불리는 대규모 자본을 소유한 부자 가문들의 자금 관리 지역으로 싱싱가포르가 주목받고다는 점이다. 보통 자국의 세금 압박을 견디지 못한 부유한 가문들이 상대적으로 세금이 낮고, 안정성이 있는 허브 국가 및 도시를 찾아 패밀리 오피스를 두면서 자금을 안치하고 운용하는 경향이 강한데, 닛케이 뉴스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전 세계 패밀리 비즈니스 운용의 15%를 담당할 만큼 자본이 몰리고 있다. 2020년 싱가포르는 400여 개의 패밀리 오피스를 운용했으나, 2024년 8월 말 기준으로는 그 수가 1650개로 급증했다. 2023년 한 해에만 300여 개의 패밀리 오피스가 새롭게 가입했고, 2024년에는 더 늘어난 것으로 예측된다.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운용하는 자산만 총 1조1100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약 1400조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글로벌 자본이 싱가포르로 모여드는 현상이 코로나 이후 지금의 싱가포르를 매우 핫한 허브로 만들기는 했지만 호사다마라고 그 이면 역시 함께 주목해 봐야 한다. 우려되는 지점은 코로나 이후 불확실한 아세안 시장을 피해, 그리고 하락하는 홍콩의 반사이익으로 인해 집중되고 있는 거대 자본의 유입이 싱가포르가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너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가진 그릇에 비해 과도하게 물을 들이부으면 넘치는 것처럼 싱가포르가 아무리 행정력이 촘촘하고, 법과 제도가 엄밀하다고 해도, 공직자 부정부패가 매년 나오는 것처럼 분명 사각지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의문을 표할 수 있는데,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싱가포르 사회를 뒤흔든 글로벌 금융 범죄조직 '푸젠갱(Fujian Gang)'이다.
2021년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에 몇몇 대륙 출신(특히 푸젠성) 중국인들이 몰려다니며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이 의심스럽다며 자금 세탁하는 일당 같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2023년 이들의 혐의를 확정 짓고 구속하면서 그 규모를 공개한 바 있다. 초기 약 1조 원 규모로 의심되던 이들의 세탁 자금은 수사가 계속되면서 지난해 하반기 약 3조 원 단위로 늘어났다. 이들이 거주하던 명품 거리 오차드 로드의 한 달 수천만 원짜리 고급 주택에는 수많은 명품, 술, 시가, 보석, 아이템, 외환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싱가포르에서의 쇼핑, 카지노, 부동산 투자 등을 통해 수백, 수천억 원 단위의 불법 자금을 세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분명 적극 협조하면서 콩고물을 받아먹은 공직자, 금융업자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략 10여 명의 남녀로 구성된 이들은 수많은 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출신 지역이 중국 푸젠성 지역이었던지라 '푸젠갱'으로 불린다. 푸젠은 대만으로부터 전해진 온라인 피싱, 스캠 조직의 본향 같은 곳으로 의심되는 지역이고, 특히 철관음 차로 유명한 안시현의 경우 그 조직원들을 길러내는 곳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이들 푸제갱의 인적 네트워크를 더 깊이 파보면 중국 대륙의 불법 자금이 홍콩으로부터 유출되었고, 캄보디아, 필리핀, 미얀마 등에서 인신매매, 온라인 도박, 피싱, 스캠 등의 방식으로 더 큰 자금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싱가포르가 이 범죄 자금의 세탁 기지로 이용된 것이다. 이는 과연 싱가포르가 안전한 자산 관리 지역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에 대해 싱가포르 정부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엄정 대처했고 철저하게 관리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지난 2월 9일 발효된 싱가포르-중국 무비자 출입국 협정으로 중국인들이 한 달간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게 되었는지라 더욱 그러한 다짐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싱가포르가 금융중심지로서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려면 단순한 자본 유치뿐만 아니라 보다 정교한 규제와 감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융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단기적 성장보다 장기적인 신뢰를 확보하는 핵심이며 무분별한 자금 유입이 싱가포르 경제의 리스크로 작용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콩을 넘어선 싱가포르가 진정한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순한 '자본의 허브'를 넘어 '신뢰의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금융 관리 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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