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미국과 중국이 싸울수록 한국이 설 땅만 좁아진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美中) 패권 경쟁에 대한 국내 전문가의 촌평이다. 미국이 엔비디아의 저사양 AI가속기 'H20'의 대중 수출을 막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 H20에 필적하는 새 AI칩을 공개했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이 가속할수록 양국 사이에 낀 K-반도체의 영토만 좁아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23일 업계에 따른 화웨이는 최근 차세대 AI칩 '어센드 920'을 공개했다. 어센드920은 연산 성능 900테라플롭스(Tflops) 이상, 메모리 대역폭 초당 4테라바이트(TB)의 성능을 보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H20과 맞먹는 수준으로,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업체인 SMIC의 6나노 공정을 통해 올 하반기 양산한다.
업계는 화웨이의 차기 AI칩 발표가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통제 직후 나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중국이 미국의 수출 통제를 예견하고 일찌감치 물밑에서 AI칩 자립화 속도를 높여왔다는 것이다. 미국이 보호무역주의 장벽을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릴수록, 중국의 추격 속도를 더 부추기는 꼴이다.
실제 중국은 '한 발짝 뒤'라는 표현이 무섭게 반도체 격차를 좁혀오고 있다. SMIC는 공격적인 투자로 지난해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스와 대만 UMC를 연달아 제치고 점유율 3위로 올라섰다. SMIC는 지난해 매출의 95%인 76억7000만 달러(약 11조 원)를 설비 투자에 쏟았는데, 중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지원 덕이다.
난감해진 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다. 당장 미국의 H20 대중국 수출 통제로 해당 AI칩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했던 양사로선 직·간접 타격을 걱정해야 한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가 빨라지면 K-반도체의 판로가 더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화웨이가 엔비디아의 'B20'까지 대체할 제품을 내놓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B20은 엔비디아가 올 2분기 중국에 출시할 예정이던 신규 중국용 AI칩이다. 중국의 추격 속도가 더 빨라지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판로는 사실상 북미 시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선 "이미 미국의 수출 규제로 중국향 HBM 판로는 완전히 막혔다"는 소리가 나온다.
북미 시장도 '관세 불확실성'에 발목이 잡혀 전망이 밝지 않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짓는 파운드리 공장이 최근 99.6% 완공됐지만, 장비 반입은 아직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2026년 말부터 양산을 시작한다는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는 입장인데, 한미 관세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느라 숨 고르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에 품목 관세를 부과할 방침을 거듭 밝혔던 만큼, 섣불리 공장에 장비를 반입했다가 25%의 관세를 얻어맞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업계 관계자는 "통상 장비 반입부터 양산까지 준비 기간(램프 업)은 6개월~1년 정도가 걸린다"며 "(양산 시점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있으니 (양국의) 관세 협상 결과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나"라고 했다.
산·학계에선 '초격차 기술력'과 '실리 영업'이 K-반도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라고 조언한다. 한국과 중국의 메모리 기술력 격차가 HBM 분야에선 최대 5년 정도 벌어져 있는데, 이 기간 기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미국과 중국 모두의 구애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회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AI반도체대학원장은 "국제반도체표준화기구(JEDEC)에서 표준화한 메모리는 1~2년, HBM은 5년 정도 한국이 중국을 앞서고 있다"며 "이 기간 안에 한국 메모리가 추격이 불가능한 수준의 초격차 경쟁력과 메모리 생태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유 원장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미중 갈등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개방돼 있다는 시그널을 줘야지, 어느 한 시장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했다.
dongchoi8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