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저술해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중국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사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사기연구회 고문 장다커가 사마천의 일생을 다룬 평전을 펴냈다.
기원전 145년 중구 산시성 용문에서 태어난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관직 태사공(역사가)을 물려받았다.
사마천은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이릉은 보병 5000명을 이끌고 흉노족과 싸우다가 8만명에게 포위당해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이릉이 상황의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패전의 책임이 대장군인 이광리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한 무제는 이 대목에서 격노했다.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기 때문이다.
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3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돈 50만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사형 △궁형 등이다.
사마천은 남성기와 고환을 도려내는 궁형을 택했다. 그는 '태사공자서'에서 궁형에 처할 당시에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라고 절규했다고 밝혔다.
궁형은 한 나라 당시에도 사형보다 치욕스러운 형벌로 인식됐다. 궁형을 당하면 환부에서 오랫동안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상처가 아물더라도 소변을 지려야 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이후 불멸의 역작 '태사공서'(사기)를 저술하면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한나라의 역사책 '한서' 62권에 사마천전에는 그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가 담겼다.
그는 편지에서 "하루에도 장이 아홉번 뒤틀리는 고통을 겪는다며 죽고만 싶다"고 적었다. 또한 궁형을 선택한 이유도 기록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참혹한 고통을 당했지만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다"
후대에 '사기'라고 불리는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짜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후 기전체는 동양 역사서의 기본 서술방식이 됐다.
◇ 사마천 평전/ 장다커 지음/ 장세후 옮김/ 연암서가/ 4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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