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골적인 친(親)러시아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소위 자유주의 진영이 군사·경제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해 온 흐름에 급제동을 걸었다.
트럼프는 종전 협상을 당사국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시작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하고 정권교체 압박까지 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3년을 맞아 미국이 주도해 유엔 안보리에 제출한 결의안엔 '러시아 침공' '우크라이나 영토보전' 등이 빠져 있었다. 러시아의 침략 책임을 명시적으로 담지 않은 것이다.
외교가에선 트럼프가 '역(reverse) 키신저' 전략을 쓰는 것이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미국의 대표적 전략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1970년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친중 노선을 주도했는데, 이젠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중러 관계를 이용하는 전략은 조 바이든 전 정부도 논의했다는 정황들이 감지된다. 양상은 달랐다.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악마화하거나, 정권교체를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1973년 냉전 시기 연방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정가에 첫발을 내디딘 바이든은 외교가 아니라 힘으로 압박하는 형태를 택했다.
일례로, 로버트 웨이드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3월 말, LSE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해 쳐놓은 덫에 푸틴이 사실상 빠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에 충분한 무기와 군사 장비를 보내 러시아 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한편으로는 가혹한 제재를 가해 러시아 엘리트들이 큰 혼란을 겪고 중산층의 삶은 팍팍해지게 하는 것이다. 무기 지원과 제재가 결합한 전략을 지속하면 봉기가 일어나 푸틴 정권은 무너지고 친서방 인물이 정권을 잡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이 전략이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명분을 푸틴이 침공을 통해 알아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한 달 뒤에 바르샤바 연설에서 푸틴을 향해 "이 사람이 더는 권력을 유지해선 안 된다"고 즉흥적으로 발언한 바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정권교체를 위해 사전에 덫을 놓았는지는 확인이 안 되지만 정권교체를 진지하게 검토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전황은 미국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강력한 제재에도 러시아 경제는 붕괴하지 않았고, 내부 시위의 불길도 확산하지 못했다. 전쟁 확대 우려로 무기 지원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한 바이든 정부에 맞서 러시아는 핵교리를 수정하는 등 더욱 대담해졌고 전세는 소모전 속에서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푸틴은 지난해 3월 5선에 성공했다. 중러는 우크라이나 전쟁 3년 동안 확고해진 서방과의 지정학적 대결 구도에서 "한계 없는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바이든의 중러 각개 격파는 실패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11월 대선 수일 전 극우 논객 터커 칼슨과 인터뷰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이 결속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나는 그들을 분리할 것이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역 키신저' 전략을 쓰기에 현재 상황이 녹록하진 않다. 키신저가 활약했던 냉전 시기엔 중국과 소련이 노선 갈등과 국경 분쟁으로 대립적인 관계였다.
한편에선 트럼프가 취임한 지 두 달이 돼 가지만 중국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하지 않고 있고 관세 정책도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2기 행정부의 대중 전략이 1기 때와 달라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중국 때리기가 외교안보노선에서 우선순위가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이 보다 설득력 있다. 임기 초반에 완료할 수 있는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중국 견제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란 전망이다. 마이크 왈츠 안보보좌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 핵심 참모들 다수가 대중 강경파들이고, 미 행정부는 당파를 넘어 지난 10여년간 중국 견제 전략을 안보 정책의 최우선순위로 삼아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외교 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며 '아시아 리밸런싱(재균형)' '피벗 투 아시아'(아시아 회귀전략)를 도입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며 무역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세웠다.
1기 트럼프의 정책 기조는 ABO(Anything but Obama·오바마만 아니면 된다)였지만 대중 견제에선 전임 정부 기조를 이어받아, 본격적인 '중국 때리기'를 시작했다. 바이든은 여기에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웠고, 또 동맹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촘촘한 그물망으로 중국을 견제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과 중동에서 미국의 관여를 다소 낮추고 인·태 지역에 외교안보 자원을 보다 많이 배치하고, 중국과의 광범위한 디커플링(경제 분리)을 추진할 것으로 대체로 예측된다. 앞으로 '역 키신저' 전략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주목해야 할 점이다. 트럼프의 대중 기조에 따라 국제질서는 크게 재편될 수도 있다. 국제질서 변동의 미풍도 한국엔 태풍이 될 수 있다. 주요 국가들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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