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강민경 기자 = 자동차·철강 수출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미군 주둔 비용까지 한국과 여러 사안이 겹치는 일본이 먼저 대미 무역협상에 나선다. 일본이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이런 일본을 대하는 미국 측의 협상 태도는 어떤지를 참고해 한국의 협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측근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장관)은 16일 미국에 도착해 첫 고위급 무역협상에 나섰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 14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일본이 16일, 한국이 다음 주에 협상을 앞두고 있다고 예고하며 "먼저 합의하는 국가일수록 유리하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우선 미국의 의중을 신중하게 파악한 뒤에 차근차근 움직이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먼저 일본이 상호관세 유예 기간인 90일 이내에 얼마나 협의를 진행할 수 있을지 타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협상의 조기 타결만 주장할 뿐 명확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일본으로서는 섣불리 나서기 조심스럽다는 분석이다.
이시바 총리는 14일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꼭 조기 타결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며 "서두르면 일을 망친다. 자꾸 타협하고 협상만 하면 된다는 방침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소비세 등 비관세장벽 철폐와 알래스카주 LNG 개발, 엔저 문제, 주일미군 분담금 등을 협상 테이블에 한꺼번에 올리는 '패키지 딜'을 예고한 상태다. 트럼프 또한 '원스톱 쇼핑'을 선호한다며 무역과 관계없는 사안도 협상의 일부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 패키지 딜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입장에서도 불리하다. 일본은 안보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기대고 있는 만큼 방위비 문제를 함께 논의한다면 무역 측면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다. 닛케이는 베선트가 일본의 이 같은 약점을 알고 있다고 짚었다.
이 매체는 "미국은 일본에 관세 인하 조건으로 안보 면에서 부담을 늘릴 것을 요구할 것"이라며 "베선트는 무역 상대국을 녹색, 노란색, 빨간색 상자에 구분해 집어넣는다. 동맹국은 녹색이지만 협상 조건은 공통의 경제와 통화 목표, 공동 방위"라고 분석했다.
이를 의식한 아카자와는 방미를 앞두고 "미국이 실현하고 싶은 게 뭔지 이해하고 관세 이외의 수법을 찾겠다"고 발언했다.
아카자와는 미국산 방위 장비 구입 확대 등을 협상 카드로 쓸지와 관련해 "만약 미국에서 요구가 있으면 청취는 하겠지만 방위상이 총리나 관방장관과 상담한 뒤 검토하는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패키지 딜' 요구에 당장 끌려들어가기보다는 회피 또는 적어도 지연 전략을 편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안보 이슈에 딴청을 피우면서 24%로 결정된 상호관세나 자동차·철강·알루미늄에 부과된 25% 품목별 관세를 낮추거나 면제받기 위한 협상에 주력하는 것이 첫 협상에 나서는 일본 대표팀의 주요 전략이다.
관세 인하를 위해 미국 측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은 뒤 미국산 제품을 제약하는 일본 내 비관세 장벽이나 LNG 등 미국 상품 수입 확대 등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협상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환율도 협상 테이블에 오를 전망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중국과 일본이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점을 공개 비판한 바 있다.
일본 공영 NHK방송은 미국 측이 외환 분야에서 어떤 요구를 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적자 해소를 원하기 때문에 미국 수출기업에 유리한 약달러를 지향하려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최근 미 국채 금리 상승(가격 하락)에 화들짝 놀란 트럼프 행정부가 가격 방어를 위해 일본에 국채를 강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달러 가치를 낮추고 일본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인 1985년 플라자 합의의 영향으로 1990년대 초 일본 경제는 거품이 완전히 꺼졌고, 디플레이션 장기화로 잃어버린 30년을 보내야 했다.

환율에 대해서는 가토 가쓰노부 재무상이 베선트 장관과 협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토 재무상은 오는 22일부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미한다.
이에 관해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NHK에 "미국에서 엔화 약세를 수정하라고 요구하더라도 환율 개입을 할 수 없고 국제사회도 플라자 합의 때처럼 협조적으로 환율 개입을 시행할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다"며 "엔화 강세와 달러 약세 방향으로 가려면 일본이 할 수 있는 건 금리 인상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 재무성은 유명 투자자 조지 소로스의 오른팔로 불렸던 '지일파' 베선트 장관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주간지 겐다이비즈니스는 전했다.
베선트는 대일 무역수지뿐 아니라 경상수지까지 적자인 미국이 과도한 달러 약세를 추구하면 시장과 재정 운영이 대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이해하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전 세계 무역 상대국을 상대로 상호관세를 발효한 지 13시간 만에 90일간의 유예 결정을 내린 배경에도 베선트의 조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겐다이는 "미국이 각국으로부터 오랜 기간 착취당했다는 피해망상이 있는 트럼프의 아래에서, 베선트는 무역 상대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어 협상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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