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권혁준 기자 = 염혜선(34·정관장)은 여자 배구에서 '투혼의 아이콘'과도 같다. 어지간한 부상을 당해도 어떻게든 경기에 나서려고 노력하는 그다.
2017-18시즌 코뼈 수술을 받고도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나섰던 염혜선이다. 2024-25시즌 포스트시즌에선 그 이상의 투혼을 보여줬다. 오른 무릎 연골이 손상된 상황에서도 챔피언결정전을 끝까지 소화했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굴의 의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시즌이 끝난 후 뉴스1과 만난 염혜선은 "정말 아팠지만 그래도 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면서 "어떻게 되는 한이 있어도 코트에서 쓰러지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고 돌아봤다.
염혜선의 투혼은 우승이라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진 못했지만, 2024-25시즌 정관장은 V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준우승팀, '빛나는 조연'으로 남게 됐다.

◇"아쉬운 준우승, 후회 남지만 정말 잘 싸웠다"
정관장의 팬이 아니더라도 아쉬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챔프전이었다. 정관장은 1, 2차전 패배 후 3, 4차전을 승리하고, 마지막 5차전에서도 풀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이미 현대건설과의 플레이오프에서도 3차전을 꽉 채웠던 정관장은, 14일 동안 한 경기 쉬고 한 경기를 뛰는 강행군을 8경기 동안 소화했다. 여기에 염혜선과 반야 부키리치, 박은진 등 부상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정규리그 챔피언이자 '배구여제' 김연경이 버티는 흥국생명을 격침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염혜선은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우리 팀원 모두가 마지막까지 정말 잘 싸웠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패배가 더 속상했다"면서도 "그래도 한편으론 홀가분하기도 하다. 길었던 시즌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다"라며 웃었다.
염혜선이 꼽은 가장 아쉬운 순간은, 최종 5차전이 아닌 2차전이다. 당시 정관장이 첫 두 세트를 따고도 내리 세 세트를 내주며 패했는데, 그 경기를 잡았다면 우승의 향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지금도 문득문득 든다고 했다.
염혜선은 "그 경기를 잡았다면, 1승1패로 우리 홈으로 갈 수 있었다"면서 "물론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친 것이기에 지나고 보니 더 아쉽다"고 돌아봤다.
역대급 명승부였기에 주변에서 많은 연락이 오기도 했다고.
염혜선은 "좋은 경기 만들어줘서 고맙다. 내가 눈물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원래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졌는데 잘했다는 게 어폐가 있지 않나.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간절함과 서운함, 배구에 대한 열정이 빚은 '투혼'
염혜선의 무릎은 사실 제대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정규리그 초반에 한 차례 통증을 느껴 진통제를 맞았고, 정규리그 막판인 6라운드에 또 한 번 같은 증상을 느낀 뒤엔 무릎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다시 통증을 느꼈고, 2차전을 결장한 뒤 3차전부터 전 경기에 출장했다. 진통제를 맞아도 점프할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상태로 경기를 뛰었다.
염혜선은 "스스로 돌아볼 때 우승이 정말 간절했다. 현대건설 때 우승 경험이 있지만, 우승을 못한지 너무 오래됐다"면서 "정말 오랜만에 우승이 코앞까지 왔기에 놓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개인 기량이 좋아도, 배구라는 팀 스포츠에선 팀이 우승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나 역시 '우승 세터'가 돼야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챔프전을 앞두고는 서운한 감정도 없지 않았다. 모든 관심이 은퇴를 앞둔 김연경의 마지막 챔프전에 쏠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염혜선은 "서운한 감정이 없진 않았지만, 그럴 바엔 악역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물론 (김)연경언니의 은퇴는 나 역시 아쉽지만, 그렇다고 져줄 수는 없었다. 이겨서 드라마를 만들고, 스포트라이트를 우리 쪽으로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1, 2차전을 내준 정관장이 3, 4차전을 내리 따낸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대전 홈팬들 앞에서 상대 팀의 우승 축포를 보게 하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염혜선은 "2차전까지 졌을 때도, 3차전 2세트까지 졌을 때도, 후배들에게 '한 세트만 더 따자'고 강조했다"면서 "홈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고, 혹시 지더라도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자는 마음가짐이었다"고 했다.
또 하나의 감정은 배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 역시 어느덧 30대 중반의 '베테랑'이기에, 경기에 대한 소중함이 갈 수록 커진다고 했다.
염혜선은 "솔직히 말해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다"면서 "그러면서 내가 진짜 배구를 좋아한다는 걸 점점 더 많이 느낀다. 눈앞에 놓인 경기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려는 생각"이라고 했다.
챔프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염혜선은, 오는 28일 무릎 연골 수술을 받는다. 재활 기간은 2개월 정도로 예상돼 다음 시즌 복귀엔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

◇"메가·부키리치 빠져서 위기라고요? 기적 한 번 더 씁니다"
눈부신 한 시즌을 보낸 정관장이지만, 당장 다음 시즌의 전망은 썩 밝지 않다. 팀의 공격을 이끌었던 '쌍포'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와 반야 부키리치가 모두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김연경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빼어난 기량을 보였던 메가의 공백은 매우 크게 느껴진다.
염혜선도 "메가는 내가 호흡을 맞춰봤던 공격수 중 손에 꼽을 만한 기량을 갖춘 선수"라며 "기량뿐 아니라 인성도 정말 좋아서 팀에 잘 어우러졌다. 그런 선수가 함께하지 못하는 게 정말 아쉽다"고 했다.
그래도 주변의 우려를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염혜선은 "지난 시즌 시작할 때도, 부키리치의 아웃사이드 히터 전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면서 "다음 시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우리 팀이 또 한 번 기적 같은 시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관장은 지난 11일 열린 아시아쿼터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에서 현대건설 출신의 위파위 시통을 뽑았다. 다음 달 열리는 외인 드래프트에서 추가 전력 보강에 나선다.
염혜선은 "외인 선수들이 어떨 지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내 선수들의 기량도 많이 올라왔다"면서 "특히 미들블로커인 (정)호영이와 (박)은진이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충분히 증명해 보였기에,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된다"고 했다.
염혜선은 배구를 '꿈'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게 느껴진다는 의미에서다.
염혜선은 "조금 힘든 시간이 있더라도, '나쁜 꿈'이라 생각하고 참고 견디다 보면, '좋은 꿈'을 꿀 때가 온다"면서 "지난 시즌은 나에게 정말 좋은 '돼지꿈'과도 같았다. 내년 시즌엔 더 좋은 꿈으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고 싶다"고 다짐했다.
starburyn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