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남=뉴스1) 안영준 기자 =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은 이번 시즌 V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우승은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를 앞세운 흥국생명이 차지했는데, 정관장도 흥국생명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다. 2인자였으나 그들의 남긴 인상은 챔피언만큼 강렬했다.
13년 만에 챔프전에 진출한 정관장은 5전 3선승제로 진행된 시리즈에서 1·2차전을 내주면서 벼랑 끝으로 몰렸다. 3차전 역시 1·2세트를 빼앗겼으니 시시하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위기에서 놀라운 뒷심을 발휘했다.
정관장은 3~5세트를 내리 손에 넣는 리버스스윕으로 3차전을 잡은 뒤 4차전까지 풀세트 끝 이겨 승부를 최종 5차전까지 몰고 갔다.
비록 '또' 풀세트 접전으로 치러진 5차전에서 마지막 5세트를 내줘 우승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V리그 역대급 드라마의 당당한 주연이었다.
특히 플레이오프부터 2주 동안 8경기를 치르는 강행군과 주전 선수들의 부상 투혼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박수받는 준우승'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뉴스1'은 챔프전 5차전(8일)이 끝나고 약 열흘 뒤인 16일, 정관장의 기적을 지휘한 고희진 감독을 성남시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아직 못 본 그날의 5차전…그래도 머릿속에 다 그려진다
"5차전은, 아직도 다시 못 보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고희진 감독은 정관장 우승이 좌절된 그날의 5차전을 아직도 다시 보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선 아름다운 패자로 치켜세우지만 사령탑 입장에선 패배는 패배다. 그것도 잊을 수 없는 쓰린 패배.
그는 "선수 때도 그렇고 우승하면 오히려 그 기억이 얼마 안 가더라. 하지만 준우승하면 기억이 정말 오래간다"고 했다.
최근 열린 국내 프로스포츠 중 최고의 명승부로 화제를 모았기에 지금도 TV만 틀면 챔프전 하이라이트가 재방송되는데, 그는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머릿속에 다 그려진단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투트쿠의 오픈을 (박)은진이가 잘 막았고 이후 (염)혜선이 디그, 박은진 세트를 부키리치가 참 잘 때렸는데 그걸 (김)연경이가 어려운 건데 받아서. 그 뒤에는 투트쿠가 때리고…."라며 마지막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뿐 아니라 정관장이 극적으로 점수를 냈거나, 아쉽게 점수를 잃었던 상황의 모든 랠리를 고 감독은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보면 얼마나 더 아쉬울지 아니까, 차마 볼 용기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마냥 축 처져 있는 건 아니었다. 특유의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바꾼 그는 "그런 명승부를 함께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 결과는 잊었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프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다만 주변에서 '참 아쉬웠다'고 인사해 줄 때만큼은 애써 잊고 있던 아픔이 가슴을 콕 찌른다"고 고백하며 쓴웃음도 지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만나자마자 위로한답시고 취재 기자가 한 번, 사진 구도를 확인하느라 이 내용을 듣지 못한 사진 기자가 또 한 번, 그리고 장소를 옮긴 식당에서 고 감독을 알아본 오지랖 넓은 사장님이 또 한 번. "어쩌면 좋냐. 정말 아쉽더라"는 인사를 건넸다. 역시 쉽게 잊기엔 워낙 강렬했던 챔프전이었다.

◇ 행운이 행복이 되기까지
고 감독의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 만난 자리는 아니었다. 정관장이 기적의 드라마를 쓸 수 있도록 연출한 감독의 비밀을 듣고 싶었다.
고 감독은 이번 시즌 성공의 비결을 묻자 "그러면 (트라이아웃이 열렸던) 두바이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면서 부키리치를 뽑았던 때를 떠올렸다.
2023-24시즌 3위였던 정관장은 이번 시즌 트라이아웃에서 140개 중 15개의 구슬만 넣고도 전체 2순위가 나오는 행운이 따랐는데, 부키리치라는 다소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아시아쿼터 메가와 재계약을 해 부키리치-메가 외인 듀오 체제로 이번 시즌을 치렀다.
고 감독은 "(원하는 선수를 뽑을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고 답했다.
'행운'으로 시작한 건 맞지만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건 고 감독의 혜안과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고 감독은 아포짓 스파이커 부키리치에게 그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아웃사이드 히터를 맡겼다. 도로공사에서 뛰던 시절 부키리치가 수비에도 감각이 있음을 눈여겨 본 것. 덕분에 정관장은 공격이 좋은 메가를 아포짓으로 활용하며, 둘의 시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만약 메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부키리치는 본 포지션인 아포짓을 탐낼 수 있었고 그러면 팀워크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 감독은 두 선수에게 저마다의 동기부여를 심어주며, 부키리치와 메가 모두가 빛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조련했다.
장점에 비해 단점도 극명했던 메가와 부키리치는 덕분에 이번 시즌 '윈-윈 효과' 속 V리그 최고의 외인 듀오로 성장했고, 특히 챔프전 5경기에서 각각 153점과 115점을 쏟아부으며 무려 268점을 합작했다.
고 감독은 "그런 외국인 선수들을 만난 건 지도자에게 큰 행운"이라고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고, 두 외인 역시 "감독님 덕분에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고 감독은 팀을 떠나기로 한 메가가 인도네시아로 출국할 때 인천공항까지 직접 배웅을 나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다. 고 감독에게 두 외인은 그만큼 큰 행복이었다.

◇ '극뽁'했기에 행복하다는 '감독 고희진'
고 감독의 '소통 능력'도 기적의 거름이었다. 이번 시즌 정규리그 초반 10경기서 4승6패를 거둔 뒤, 고 감독과 선수들은 '눈물의 소통'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 감독은 "소통이라는 게 단어 뜻 자체가 서로 다 털어놓는다는 뜻이다. 한쪽만 이야기하거나, 할 이야기만 하면 그건 소통이 아니다"라면서 "나도 내가 그전까지는 소통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진짜 소통'을 하고 난 이후, 우리 팀은 완전히 달라졌고 최고의 팀 분위기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한 배구 관계자는 "정관장은 감독, 코칭스태프, 선수들 간 단순히 분위기가 좋을 뿐 아니라 엄청난 신뢰가 느껴진다"고 귀띔했다.
이후 정관장은 구단 역사상 최다인 13연승을 달리며 상위권으로 도약, 플레이오프를 거쳐 역사를 쓸 수 있었다.
고 감독은 "사실 챔프전에서 두 경기를 지고 3차전도 두 세트를 내줬으면, 그대로 그냥 무너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소통에 도가 텄다. 최고의 팀워크를 가졌기에 그 상황에서도 한 번 더 힘을 모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함께 모여 눈물을 쏟았던 그날의 변곡점이 가장 중요한 순간 대단한 기적을 끌어낸 셈이다.

고 감독은 위기에 몰렸던 3차전을 앞두고는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 나오는 유행어를 인용해 "극뽁~"이라는 말과 익살스러운 제스쳐를 준비, 경기 전 선수들에게 보여줬다. 무거운 분위기 속 부담감을 느낄 선수들을 위한 묘수였다.
그는 "선수들이 한 번이라도 더 웃어보길 바랐다“고 했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세터 염혜선은 "분위기가 처질 수도 있었는데 감독님 노력 덕분에 '끝까지 해보자'는 분위기가 잡혔다"고 했다.
선수들뿐 아니라 고희진 감독에게도 이번 챔프전은 의미있다. 지도자 커리어에서의 어려움을 '극뽁'하고 더 성장할 수 있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선수들과 더 잘 소통하고, 좋은 팀워크를 만들어가는 게 감독에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지도자 커리어에서 다시 없을 명승부를 치러봤으니, 난 행복한 지도자다. 이 기억은 앞으로 감독으로서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다시 뛰는 정관장과 고희진
이제 정관장은 2025-26시즌을 향해 다시 뛴다. 스스로 더 성장했다는 고희진 감독도 함께다.
여자 프로배구는 한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다음 시즌에도 연속성을 가져가는 게 쉽지 않다.
언급했던 지난 시즌 V리그 최고의 외인 듀오 '메가리치(메가+부키리치)'가 모두 떠나는 정관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비시즌이 더 중요하다.
정관장은 우선 아시아쿼터로 V리그 경험이 있는 위파위 시통(태국)을 지명했다. 도로공사에서 데려왔던 부키리치가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고 감독이 위파위에게 어떤 새로운 색을 입힐지 기대가 모인다.
고 감독은 5월 5일부터 11일까지 튀르키예에서 열릴 외국인 트라이아웃과 국내 선수 구성 등 새 시즌 구상에 돌입했다. 그는 "이제는 아쉬움 느낄 틈도 없을 만큼 다시 바빠질 것"이라며 머리를 뜯는 시늉을 했다.

고 감독은 다음 시즌 더 나아갈 것을 약속했다.
고 감독은 2022-23시즌 정관장에 부임, 여자배구 지도자로 첫 커리어를 시작해 4위를 기록했다.
2023-24시즌에는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승2패로 챔프전에 오르지 못했다. 이번 시즌에는 여자팀을 이끌고 처음 챔프전까지 갔지만, 마지막 단 한 세트를 얻지 못해 우승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는 "계속 조금씩이 부족해 아쉬움이 남았다. 새 시즌에는 더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게끔, 부족한 게 없는 팀 운영을 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준우승 경험은 간직하되 영광은 잊겠다. 처음부터 다시 잘 시작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인터뷰까지 다 마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자리를 끝내려는 찰나, 고 감독이 말했다.
"그동안의 아쉬움은 오늘부로 다 털어버리고, 다시 가 봐야죠. 이제는 5차전 챔프전 영상도 한 번 돌려볼랍니다."
tr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