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최재헌 기자 = 세계 각지에서 법정화폐와 가치를 연동한 스테이블코인 발행·연구를 위해 대기업들이 합작법인을 세우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통 금융사의 인프라를 활용해 송금이 빠르고 수수료가 저렴한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을 살려 송금·결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 체계를 일찍 마련한 일본과, 관련 제도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는 '금융 중심지' 홍콩에서 기업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올해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규제 준수에 유리한 '기관' 주도로 꾸려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반면 한국은 이제서야 부랴부랴 첫 삽을 뜬 실정이다. 올해부터 일부 법인의 코인 투자가 가능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 등을 담은 규율은 아직도 없다. 금융당국이 해당 내용을 담은 가상자산 2단계 법안을 올 하반기 입법한다고 공언했지만 단지 '목표'일 뿐 법안의 윤곽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이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엑스알피(XRP) 발행사 리플랩스는 최근 발간한 '2025 가상자산 전망'에서 올해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잭 맥도날드 리플 스테이블코인 수석부사장은 "올해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규제를 준수하는 발행사 위주가 될 것"이라며 "기관의 지원과 견고한 규제 준수 시스템을 갖춘 발행사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와 가치를 연동해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가상자산이다. 빠른 송금 속도와 저렴한 수수료로 차세대 결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맥도날드 부사장은 "24시간 즉시 결제, 저비용 등의 이점 때문에 글로벌 결제를 위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도 전통 대기업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글로벌 은행 스탠다드차타드와 홍콩 블록체인 투자사 애니모카브랜즈, 홍콩 통신사 HKT는 지난 17일 스테이블코인 관련 합작법인을 설립한다고 밝혔다. 해당 법인은 홍콩달러(HKD)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 위한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다.
전통 은행의 인프라와 웹3 기업의 기술력, 통신 기업의 모바일 지갑 기술을 결합해 스테이블코인 활용 사례를 발굴한다는 방침이다. 애니모카브랜즈는 "이번 합작법인은 홍콩 금융관리국(HKMA)의 라이선스 제도 도입 이후 법정통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도 이미 금융사를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 합작법인 '프로그맷'을 세운 사례가 있다.
프로그맷은 원래 일본 금융사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MUFG)의 자회사였으나 지난 2023년 미즈호은행,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 SBI PTS홀딩스 등 금융사들이 모여 합작법인으로 재탄생했다. 일본 최대 통신 기업 NTT와 웹3 스타트업 데이터체인도 합작법인 설립에 참여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적극 진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MUFG는 엔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프로그맷에서 발행하기 위해 일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JPYC와도 손을 잡았다. 프로그맷은 지난해 국경 간 스테이블코인 송금 시범 테스트에 나섰으며 올해 한국 블록체인 기업 페어스퀘어랩, 커스터디(수탁) 기업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과 글로벌 송금·결제 시스템 구축을 위한 사업을 공동 추진한다.
홍콩과 일본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사업 진출에 나선 이유는 관련 규율 체계가 명확히 자리 잡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정부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HKMA는 지난해 7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를 위한 규제를 마련하고 법정화폐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대한 라이선스 제도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스탠다드차타드, 애니보카브랜즈, HKT가 샌드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과 광고 및 마케팅 행위 규제, 소비자 보호 등의 내용을 담은 스테이블코인 법안이 홍콩 입법회에 상정됐다. 홍콩 입법회는 "해외 가상자산 기업의 홍콩 진출을 촉진하고 금융기술 발전을 이끌 목적"이라고 전했다. 홍콩 재무장관도 이날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컨센서스 홍콩'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 체계를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한 만큼 관련 법안도 조속히 통과될 것이란 전망이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 체계를 확립했다. 일본은 지난 2023년 6월 개정된 자금결제법을 시행해 스테이블코인을 전자결제수단으로 분류했다. 또 은행과 신탁회사, 자금 이체 사업자도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했다.
일본 금융청(FSA)은 기존에 막아왔던 해외 발행 스테이블코인의 유통도 허용했다. 해외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할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이에 따라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 가상자산 엑스알피(XRP) 발행사 리플랩스도 일본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출에 관심을 보인다. 브래드 갈링하우스 리플랩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일본은 규제 명확성으로 기업이 번창할 수 있는 환경"이라며 "엔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많은 수요가 몰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이 없다.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 등의 내용을 담은 가상자산 '2단계 법안'이 아직 논의 중이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올 하반기 2단계 법안 마련을 목표로 잡았지만 아직 법안의 윤곽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입법돼도 국회의 논의를 거쳐야 하므로 법안 시행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위가 뒤늦게 올 하반기부터 일부 상장 기업과 전문투자사의 코인 투자를 허용하며 기업의 시장 진출을 위한 '첫 삽'을 떴지만,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출에는 한계가 있다. USDT와 USDC와 같은 스테이블코인을 구매해도 관련 체계가 없어 단순히 보유만 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스테이블코인은 외국환거래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있지만, 관련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송금·결제하기엔 부담"이라며 "우선 체계를 마련해야 기업들도 스테이블코인 활용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선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해외 송금과 결제 비용을 절감하고 스마트 콘트랙트를 통한 기업 간 거래(B2B) 결제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다. 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빠르게 글로벌 결제가 가능하다.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을 활용하고 글로벌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결국 2단계 입법 통과 시점이 관건이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센터장은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디지털자산 기본법 제정을 위한 포럼"에서 "시장 잠식을 막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규율을 포함한 2단계 입법이 중요하다"며 "한국도 2단계 법안을 통해 기업에 규제 명확성을 부여하고 관련 산업을 유치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chsn12@news1.kr
편집자주 ...이제 '대한민국 법인'도 비트코인을 산다. 해외서는 이미 일상이지만 뒤늦게 한국도 법인투자가 허용됐다. '개인' 투자자 일색인 한국 가상자산 투자 지형도에 일대 지각변동이다. 검찰은 범죄수익으로 몰수한 가상자산을, 대학은 기부받은 가상자산을 팔 수 있게 됐다. 가상자산 거래소도 그간 당국 눈치를 보느라 손대지 못한 보유 가상자산 현금화가 가능해졌다. 상장사 등 3500개 법인에 가상자산 투자 기회가 생겼다. '가보지 않은 길'이 열린 셈이다. '큰손' 법인의 등장은 어떤 지형 변화를 몰고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