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한장에 10만원, 환불도 안돼"…빗나간 상혼에 소비자 '분통'

보세·디자이너 브랜드, 질은 낮고 가격은 천정부지
"백인 모델 쓰고 가격 올려"…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관광객들이 가을 옷이 전시된 의류매장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자료사진) 2024.9.19/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관광객들이 가을 옷이 전시된 의류매장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자료사진) 2024.9.19/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사고 싶은 보세 봄 외투가 20만원이라는 거예요. 디자이너 브랜드 티셔츠 한 장은 10만 원씩 하고요. 그런데 '주문 제작'이라면서 환불도 안 된대요. 무슨 백화점 옷도 아니고, 짜증 나서 안 샀어요.

(서울=뉴스1) 신윤하 기자 = 직장인 박 모 씨(32)는 며칠 전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봄옷을 사려다 포기했다. 예전에 백화점에서 옷을 살 수 있었던 돈으로 겨우 보세 옷을 장만한다는 게 울화통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이 돈이면 디자이너 브랜드를 사겠는데?', '이 돈이면 백화점 옷을 사겠는데?' 하다가 결국 열 받아서 아무것도 안 샀다"고 한숨을 쉬었다.

보세 기성품인 데다가 맞춤 제작도 아니면서 '주문 제작이라 교환·환불이 안 되고, 배송은 3주 후 시작한다'는 내용의 공지도 지갑을 더 닫게 만들었다. 재고를 남기지 않으려 주문 확인 후 제작을 시작하는 것이면서 소비자에게만 부담을 떠넘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가가 전반적으로 올랐다는 것을 감안해도, 최근 국내 의류 가격에 거품이 끼고 서비스의 질은 하락했다는 소비자들의 볼멘소리가 분출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세였던 쇼핑몰들이 디자이너 브랜드로 둔갑해 가격을 올리고선 그만큼의 서비스는 하지 않는다'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본문 이미지 -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백인 모델 쓰고 20만 원 올리면 그만?"…재고 줄이려 '주문 제작'하면서 교환·환불 거부

패션에 관심이 많아 월급의 절반 정도를 쇼핑에 쓴다는 직장인 송 모 씨(35)는 최근 온라인 패션 플랫폼 등에 입점한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보세 옷 구매를 멈췄다. 값이 너무 올라 가격적인 차별성이 없어졌는데, 서비스와 의류 질은 백화점 수준에 크게 못 미쳐 굳이 구매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송 씨는 "몇 번 세탁하면 망가지기 쉬운 여름 티셔츠 등을 고가로 팔면서 '드라이클리닝으로 관리하라'는 식의 쇼핑몰과 브랜드들이 너무 많다"며 "차라리 어렸을 때 소위 '메이커'라 불리던 외국 브랜드 옷을 더 선호하게 된 거 같다"고 말했다.

유통단계가 복잡해지고, 보세 업체가 '자체 브랜드'가 되는 경우가 무분별하게 많아지면서 질은 예전과 비슷한데, 옷값에 거품이 끼는 것 같단 지적도 나온다. 지난 16일 SNS 스레드엔 한 이용자가 "요즘 보면 29cm, W컨셉에 입점한 브랜드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보세 아니었나"며 "갑자기 백인 모델을 데려와서 촬영하고, 혼용률 좀 개선하고, 가격은 20만원 플러스(시킨다)"라는 내용을 글을 올렸다. 해당 글은 공감 1300개를 받았다.

브랜드들이 제품을 출하할 때부터 할인가를 고려해 판매가를 높이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있다. 송 씨는 "보세 쇼핑몰들도 대충 한국인 체형과 맞지도 않는 서양인 모델을 앞세운 뒤 자체 제작 옷이라며 브랜드를 내는데 질이 안 좋다"며 "무신사 같은 대형 플랫폼을 이용한 세일 공세도 유효한 것 같지 않은 게, 원래 10만 원이면 살 옷을 20만 원에 올려놓고 20~30% 세일을 걸어놓는 것 같다는 불만을 주위에서 자주 듣는다"고 했다.

보세 쇼핑몰들과 디자이너 브랜드들에서 재고를 줄이려 '주문 확인 후 제작'하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배송 기간은 길어지고, 교환·환불을 안 해주려 한다는 점도 소비자들의 구매 요인을 감소시켰다.

이같은 업자들은 "맞춤 제작이라 교환·환불이 어렵다"고 공지하지만, 전자상거래법 제17조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물품을 주문한 뒤 일주일 이내라면 누구나 교환·환불을 받을 수 있다. 주문 제작 상품의 경우에도 명목만 주문 제작일 뿐 실제로 이미 사이즈·섬유 등이 정해져 있는 기성품에 가깝다면 교환·환불이 가능하다.

3년 차 직장인 김 모 씨(29)는 "주문량만 생산해 판매해서 재고를 줄이겠단 업자들의 마음도 알겠지만, 기성품을 주문받자마자 발주한다고 '맞춤 제작' 제품이 되는 건 아니지 않냐"며 "제작 제품이라서 교환·환불이 안 된단 공지가 넘쳐나는데,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해 보니 그런 업자들의 말은 거짓이었다"고 말했다.

본문 이미지 - 유례 없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19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관광객들이 가을 옷이 전시된 의류매장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주말까지 많은 비가 내리면서 19일 늦은 오후부터 대부분 지역에서 폭염특보가 해제되겠다. 2024.9.19/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유례 없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19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관광객들이 가을 옷이 전시된 의류매장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주말까지 많은 비가 내리면서 19일 늦은 오후부터 대부분 지역에서 폭염특보가 해제되겠다. 2024.9.19/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시즌오프' 노리거나 빈티지·알리 찾는 소비자들…"디자이너 브랜드, 보세 질과 다를 바 없어"

이러한 이유로 중고 의류를 파는 빈티지 가게나 가격이 절대적으로 저렴한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C-커머스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차라리 평균 이상의 의류 질을 보장하는 SPA 브랜드의 세일이나 시즌오프 세일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다.

최근 빈티지 가게에서의 의류 소비가 늘었다는 진 모 씨(35)는 "오래되긴 했지만 원단 자체가 좋은 빈티지 옷들이 질 낮은 보세 옷보다 낫다"고 했다.

평소에 SPA 브랜드를 많이 찾는 이 모 씨(34)는 "요즘 옷 하나 집어 보면 7만 원, 10만 원 이래서 옷 사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SPA 브랜드 세일만 기다린다"며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보세 질과 다를 바 없어서 '이 옷을 이 돈 주고 사 입어야 하나' 싶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반적으로 물가가 오르고 있어 의류 가격 상승이 당연하다면서도, 국내 보세 쇼핑몰들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최신 유행을 빠르게 좇는 이들의 소비 욕구를 이용해 의류 값을 과도하게 높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보통 보세 옷은 소비자 입장에서 (트렌드에 민감해) 독특하다는 특성이 있어, 그런 걸 좋아하는 이들은 보세를 많이 구매한다"며 "보세는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에 비싸지 않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보세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소비자의 욕망을 포착해 가격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했다.

sinjenny9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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