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남해인 기자
"또 시작이네."
지난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일대를 걷던 직장인 이 모 씨(29)는 일행과 정당 현수막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씨가 본 현수막에는 '더불어민주당 해체!', '이재명이 내란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씨가 서있는 곳에서는 '국민께 죄송합니다'라는 문구의 국민의힘 현수막과 '내란당 해체'라는 시민단체 현수막도 한눈에 보였다.
이 씨는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온갖 군데 정당 현수막이 붙을 텐데 보는 사람 입장에선 지긋지긋하다"고 호소했다.
조기 21대 대통령 선거(대선) 국면이 다가오자 시민들은 반강제로 접하는 정당 현수막이 확산할 것을 걱정하며 피로감을 호소한다. 정당 현수막 내용이 다른 정당에 대한 비방 문구가 주를 이루면서 본래 취지를 잃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당 현수막은 정당이 내세우는 정책을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어 시민의 정치 참여를 높이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온라인 포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하는 데 익숙지 않은 장년층이 정치 관련 소식을 접하거나 정당의 공약과 당론을 파악할 수 있는 통로로 기능하기도 한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횡단보도에선 장년층 남성 4명이 근처에 앉아 가로등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들을 가리키며 열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반면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횡단보도에서 만난 50대 여성 박 모 씨는 평소와 달리 텅 비어있는 보행자 신호등 위 공간을 바라보며 "살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씨가 서있던 횡단보도는 1년 중 정당 현수막이 안 붙어있는 날이 더 적을 정도로 현수막 설치 단골 자리였다. 박 씨는 "대선 앞두고 새 현수막을 붙이려나 보다"라며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매일 강제로 현수막 내용을 읽어야 하는 게 고통이었다"고 토로했다.
앞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기간에는 서울 거리 중 시민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횡단보도 곳곳에선 두 정당이 서로를 비방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마주보고 걸려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대선 기간에는 중앙선관위가 공직선거법에 따라 현수막 내용에 관한 규제를 실시한다. 공직선거법 90조에는 선거 120일 전부터 혹은 보궐선거 등에서는 선거의 실시사유가 확정된 때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현수막 등 광고물이나 광고시설의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실에 따르면 중앙선관위는 공직선거법상 현수막 등 정당 광고물 설치 제재가 적용되는 시점을 "헌재의 탄핵심판 인용 결정이 있는 때"라고 해석했고, 이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특정 인물에 대한 내용이 있는 정당 현수막들에 대해 국민의힘은 철거 조치 공지를 냈다.
하지만 평소에 '네거티브성' 내용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는 데다, 대선 기간에는 비방 문구 대신 호소성 문구가 담긴 현수막들이 양적으로 늘어나며 시민들의 피로감이 증폭되는 모습이다.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대 대선 당시에만 10만 5000여 장의 현수막이 사용됐다. 19대 대선보다 두 배 많은 양이다.

다양한 매체가 발달한 현시대에 맞춰 정치권이 현수막을 늘리는 대신 새로운 홍보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유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8일 뉴스1과 통화에서 "정치권이 현수막 이외에 대중하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아직도 개발을 못 한 것"이라며 "선거 기간 외에도 거의 매일 갈라치기, 부정 프레임으로 점철된 현수막들이 걸려있으니 시민들에게 피로감만 줄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유 교수는 "수십 년 전 수단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이렇게 미디어가 많은 시대에 대중과 어떻게 접점을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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