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07년 12월 6일 오후 6시쯤 인천 강화 황산도라는 작은 섬에서 군인 2명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 걸 목격했다는 다급한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가 접수되자마자 경찰서에 긴급 비상이 걸렸다.
현장에는 군인 1명이 흉기에 찔려 의식을 잃었고 또 1명은 얼굴을 크게 다친 채 쓰러져 있었다. 흉기에 찔린 군인 1명은 결국 사망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군인 2명은 해병대 소속으로, 경계 근무를 나가던 중 습격당한 상황이었다. 범인은 경계 근무 보초를 서러 가는 2명을 시속 20㎞ 속도의 차로 들이받은 뒤 차에서 내려 흉기로 위협했다.
범인은 격투 과정에서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상처를 입기도 했으나 군인들이 의식을 잃은 틈에 무기를 가져갔다. 사라진 무기는 소총 1정, 실탄 75발, 수류탄 1발 등이었다.
자칫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군경도 일제히 긴장했다. 강화, 김포, 일산 일대에 '진도개 하나'가 발령됐다.
생존한 군인의 진술을 토대로 범인이 3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라는 걸 파악한 경찰은 범인이 타고 있던 차종과 색상을 파악한 뒤 일대에 있는 폐쇄회로(CC)TV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 인근 모텔 CCTV에서 범인의 차량으로 추정되는 차가 포착됐다. 생존자 진술과 동일한 차는 사건 현장 쪽으로 이동했고, 이후 어느 우체국 앞에서 목격됐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차에 붙어있던 대리운전 광고용 시트지를 떼어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수사팀은 해당 차를 용의선상에 두고 추적을 이어갔다. 차는 얼마 뒤 경기도 평택의 한 IC로 빠져나갔다.
검표원은 용의 차량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속도를 서서히 줄여 요금을 지불하고 나가는 일반 차량과 달리 문제의 차량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가 후진하더니 운전자가 얼굴을 숨긴 채 손을 뒤로 뻗어 돈을 냈다고 진술했다.
CCTV에 찍힌 영상에는 범인이 까만 옷을 덮어쓰고 햇빛 가리개, 휴지 등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담겼다.
영상에는 차량번호 '9118'도 정확하게 찍혔다. 경찰은 곧바로 차적 조회를 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차종이 조회됐다. 범인은 검문 CCTV를 피해 이동하기 위해 번호판을 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유사 차량번호 네 자리를 무작위로 조회했다. 이때 한 형사가 사진을 뚫어져라 보다 숨겨진 진짜 차량번호 '9148'을 발견하게 된다.
차적을 조회하고 차량 주인을 특정했지만, 차주는 사건이랑 전혀 혐의점 없는 인물로 드러났다. 범인이 탄 차는 사건 발생 두 달 전 도난 신고된 차량이었다.
수사 1일 차가 지나고 다음 날 새벽 경기도 화성 인근에서 용의자 차량이 발견됐다. 방화한 듯 완전히 전소된 상태였다.
국과수 감식 결과 차에서는 탈취한 총기뿐만 아니라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급히 몽타주를 만들어 현상금 3000만 원을 걸고 전국에 공개수배를 시작했다. 얼굴을 다친 범인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단서는 없었다.
사건 발생 5일 후 부산의 한 우체국에 우편물 하나가 접수됐다. '경찰서 보내주세요. 총기탈치(취)범입니다'라고 적힌 봉투 안에는 자필 편지가 들어 있었다.
문맥도 이상하고 맞춤법도 틀렸지만 내용은 굉장히 디테일했다. 구체적이고 현장에 없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작성자는 "저는 이번 총기사건의 주범입니다. 먼저 저의 잘못으로 희생된 일병의 죽음에 큰 사죄를 드립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자수를 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먼저 총기는 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 지나자마자 옆 길가에 버렸습니다. 범행 도구는 부엌칼과 대나무창이며 죽일 의도는 없었습니다. 차로 치어 상해를 주었는데 장병이 쓰러지지 않고 총구를 겨눠 본능적으로 공격했습니다"라고 적었다.
범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이 쓴 편지가 맞다고 판단한 경찰은 편지에 적힌 전남 백양사 휴게소로 출동했다. 수색 결과 K2 소총 1자루, 수류탄 1발, 탄통에 든 실탄 75발, 유탄 6발을 비롯해 범인이 사용했던 휴대전화가 발견됐다.
편지에도 결정적 증거인 범인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 지문 감식을 진행한 결과 범인은 35세 남성 A 씨였다. 형사는 A 씨 지인의 도움을 받아 그를 유인하기로 하고 잠복 끝에 검거했다. 정수리 부근에는 총기를 빼앗는 과정에서 생긴 5㎝ 정도의 상처를 꿰맨 흉터가 선명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서울 종로3가 귀금속 도매 상가에서 붙잡힌 A 씨는 헌병대로 인도됐다.

조사에서 A 씨는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내가 처참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진술했다.
A 씨는 초병 살해 및 상해, 군용물 강도 등의 혐의로 1심인 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한 A 씨는 항소를 제기했다.
항소심인 고등군사법원은 피해 군인이 경계 근무 중이라는 걸 몰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살해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초병 살인 상해죄가 아닌 일반 상해 살인죄를 적용해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수감된 A 씨는 복역을 마치고 2022년 12월 11일 만기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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