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는 아가씨가 안 보인다"…가슴에 흉기 꽂힌 채 억울한 죽음

검침원 가장해 침입…성폭행하려다 '강도야' 소리에 살해[사건속 오늘]
3명 동시 성폭행하고 처벌 면해…물증 없애는 완벽한 뒤처리 수사 애로

 ⓒ 뉴스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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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입추를 사흘 앞둔 2004년 8월 3일, 서초경찰서 형사들은 아침부터 기온이 30도 가까이 오르는 등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선풍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00빌라에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고자는 "지하 방에서 악취가 올라오고 있으며 세 들어 사는 아가씨가 1주일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악취'라는 단어에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형사는 현장으로 출동, 지하방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방바닥은 굳어진 피, 벽에는 핏자국이 흐트러져 있었다. 작은 화장대 옆에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여성 시신이 있었다.

◇ 흉기 꽂힌 채 숨진 여성…단서는 전무하다시피, 원한 관계일까

여성은 가슴에 흉기가 꽂힌 채 숨져 있었고 더운 여름철인 만큼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 피부가 거의 다 녹아 버렸다.

지원 요청을 받고 도착한 강력반, 과학수사팀은 시신을 수습한 뒤 단서를 찾기 위해 방 구석구석, 집 주변을 살폈다.

1cm 단위로 살폈다 할 만큼 정밀 수색했으나 나온 건 방바닥에 찍혀있는 245mm 슬리퍼 자국뿐이었다.

이에 경찰은 피살자 신원확인과 함께 목과 가슴, 복부에 무려 7개의 깊숙한 자창이 나 있고 흉기를 그대로 꽂아둔 점, 집안을 뒤진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원한에 의한 살인'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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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살자는 32살 돌싱…노래방 도우미로 힘겹게 살아

숨진 여성은 32살 A 씨로 5년 전 이혼한 뒤 서초구를 중심으로 노래방 도우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A 씨 주변을 살피던 경찰은 A 씨가 이혼 뒤 만난 남성과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남자 쪽 집안 반대로 헤어진 사실을 찾아냈다.

이에 해당 남성을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조사를 했으나 알리바이가 완벽했다.

◇ 너무 완벽한 사건 현장…수차례 정밀수색 끝에 벽에서 나온 희미한 O형 핏자국

경찰을 괴롭힌 건 사건 현장이 너무 완벽했다는 것.

A 씨 것 이외의 머리카락도 단 한 가닥도 나오지 않았고 지문, DNA자국 등이 전혀 없었다.

형사들은 이처럼 현장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으로 봐 동일수법의 강도 전과자 혹은 강도강간 전과자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과학수사팀은 벽, 욕실, 방바닥, 천장 등을 특수 형광물질을 사용해 여러 차례 살핀 결과 벽에서 A 씨의 혈액형(A형)과 다른 O형 핏자국을 발견했다.

노련한 형사들은 이 핏자국이 잔인하게 흉기를 박아 넣던 범인이 흉기 손잡이 쪽 날에 자기 손가락 일부를 다쳤고 그때 순간적으로 품어져 나온 피가 벽에 닿았다고 해석했다.

범인은 손을 살짝 베었고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기에 벽에 핏자국을 남길 것으로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찰은 흉기를 가슴 깊숙이 꽂아 넣은 것으로 봐 범인이 상당한 완력을 지닌 20~40대 남성, 0형이라는 선까지 윤곽을 좁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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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살자 마지막 통화 '지금 가스 검침 중'…수사의 터닝 포인트

통화 기록을 살핀 경찰은 2004년 7월 28일 오후 A 씨와 마지막 통화를 한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28일이 A의 생일이기에 친구들이 모여 저녁을 사주고 밤새워 놀 생각이었다"며 "이런 일정을 논의하던 중 A가 '지금 가스 검침원이 왔다, 조금 있다 다시 연락하자'고 전화를 끊더라"고 했다.

이후 다시는 A 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것.

경찰은 A 씨 사망시점을 28일 오후로 특정하고 비슷한 시간대 가스검침이 있었는지 살폈다.

하지만 그날 A 씨 집은 물론이고 그 일대에서 가스 검침한 사실은 없었다.

벽에 막혔다고 생각하던 순간 형사들의 머리를 스치는 미제 사건이 있었다.

◇ 가스 검침원 가장, 혼자 사는 여성 10명 강간…그놈은 34살 B

서초구 일대에서 일어났지만 해결하지 못한 강간 사건 중 10건이 비슷한 형태를 따고 있었다.

바로 가스 검침을 가장해 혼자 사는 여성 집에 들어간 뒤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것.

이에 형사들은 강간 사건이 일어난 시간, 그 장소 주변의 통화 내역 전부를 살폈다.

여러 밤을 새우는 수고 끝에 경찰은 10군데 장소에 모두 같은 인물이 등장해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내친김에 지난 5년간 강간 미제사건까지 살핀 결과, 5건의 미제사건에서 같은 인물이 핸드폰 통화를 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전화를 한 인물은 34살 남성 B로 강도 전과 이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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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한 뒤 전화번호 변경, 완벽한 뒤처리는 교도소에서 배워…핏자국 DNA와 일치

B 체포에 들어간 경찰은 위치추적 끝에 충북의 한 낚시터에서 은신을 겸해 시간을 보내고 있던 B를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하던 형사는 B에게 혈액형을 묻자 "O형"이라는 답을 얻자 쾌재를 불렀다.

여기에 핏자국에서 검출한 DNA도 B와 일치했다.

얼마 뒤 드러난 사실이지만 B의 완벽한 현장 처리, 범행 후 전화번호 변경, 고의적인 슬리퍼 자국, 검침원 가장 등은 강도 혐의로 복역할 때 교도소에서 배운 것이었다.

◇ 99.99% 범인이지만 성폭행 피해자 진술 꺼려…설득 끝에 대질 조사, 남은 0.01% 채워

경찰은 B가 범인이라는 걸 99.99% 확신했지만 B는 15건의 성폭행 범죄 사실 외 A 씨 살해사건만은 '아니다'로 일관, 100% 기소를 자신하지 못했다.

B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폭행 피해자와 대질조사해 그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형사는 피해자들의 협조를 구했지만 또다시 악몽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을 꺼리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한 피해자의 도움을 받는데 성공, 대질조사를 통해 "내가 A 씨를 죽였다"는 B의 자백을 받아냈다.

◇ 피해자 "약속시간 촉박, 빨리 가스 검침" 독촉에 '완벽 제압 뒤 성폭행' B의 계획 어긋나

B는 다른 성폭행 사건처럼 △ 가스 검침을 가장해 들어간다 △ 집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살핀다 △ 대상자를 위협해 결박,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 완벽히 제압한 상태에서 성폭행, 이후 주변을 정리한다 △ 만일을 대비해 전화번호를 바꾼다는 계획아래 A 씨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A 씨가 "약속 시간이 촉박하다. 빨리 검침해 달라"고 재촉하자 B는 피해자를 결박할 틈이 없음을 깨닫고 곧장 흉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 A 씨가 "강도야"라고 외치자 B는 흉기를 마구 휘둘러 살해하고 말았다.

ⓒ News1 양혜림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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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명을 동시 성폭행하고도 집유로 풀려났던 B, 이번에 무기징역형

B는 15차례나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으나 피해자들이 진술을 거부하는 바람에 강간으로 처벌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2001년 12월 13일 오후 3명을 동시에 성폭행한 건과 관련해 강도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당시 집을 나서려던 피해자를 위협해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 B는 방에 다른 여성 2명이 더 있는 것을 발견, 흉기로 이들을 위협해 결박했다. 이어 3명을 차례로 성폭행했다.

피해자들이 수치심에 B를 강도로만 신고, B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등 처벌수위가 낮았다.

현재 B는 A 씨 살해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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