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뉴스1) 황덕현 기후환경전문기자 = "수십억 개의 플라스틱을 매일 쓴다는 사실보다, 그걸 모아 고래를 만든 이미지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은 21일 뉴스1에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지난 20년 가까이 '숫자의 초상'(Running the Numbers)이라는 연작을 통해, 쓰레기 통계를 감정이 있는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작 '고래'(Whale)는 미국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THANK YOU' 문구가 인쇄된 비닐봉지 5만 장으로 구성됐다. 조던은 이 봉지들을 점처럼 찍어 모아, 바다 위를 떠도는 고래 한 마리를 형상화했다. 태평양 해역에 실제 존재하는 해양 쓰레기의 밀도를 반영한 것이다.
15년 이상 이어온 이 작업은, 일상에서 소비되는 비닐봉지와 병뚜껑, 라이터 등을 하나하나 촬영해 이미지로 조합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수백 장의 촬영본이 쓰이고, 제작에는 4개월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조던은 "숫자만 보고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쓰레기의 숫자 뒤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며, 일상의 소비를 기후·환경 문제와 연결해왔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개관 20주년을 맞아 열린 기후 위기 기획사진전 '더 글로리어스 월드'(The Glorious World)에는 조던의 대표작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고래' 외에도 '해양 환류'(Gyre), '파란'(Blue), '비너스'(Venus) 등 대표작이 전시됐다. 이 행사는 충무아트센터와 환경부 산하 국립생태원이 공동 주최했다.

'환류'는 일본 판화 '우키요에' 작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큰 파도'를 떠오르게 한다. 240만 개의 플라스틱 조각으로 집채만 한 파도를 만들었다. 거대한 파도가 쓰레기로 이루어져 관람자를 향해 몰려오는 형상은, 인간이 만든 오염이 결국 다시 인간 사회를 덮친다는 경고처럼 다가온다.
'환류2'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킨다. 5만 개의 라이터 이미지를 배치해 범람하는 쓰레기 위험성을 나타냈다.
‘비너스’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고전 회화 '비너스의 탄생'을 재해석한 작업이다. 전 세계에서 10초마다 소비되는 비닐봉지 24만 개 분량으로 구성됐다. 바다에서 태어난 사랑의 여신은 이제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위에 다시 등장한다. 조던은 "비너스는 어머니이자 생명의 상징인데, 지금 그 어머니가 병들어 있다"고 해석했다.
이번 전시에는 닉 하네스 벨기에 겐트 왕립예술학교 교수도 참석했다. 닉 하네스 교수는 '중동의 맹주' 두바이의 이면을 담은 '환희의 정원'(Garden of Delight) 연작을 소개했다.
하네스는 사막 위에 조성된 초고층 빌딩과 오직 관광만을 위한 인공섬, 실내 스키장, 인공적으로 조성된 열대우림 등 소비를 위한 도시에 주목했다. "열대 지역의 명소로 만들어진 '얼음 동굴 카페'에서 마시는 핫초코는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화려하지만 정체성은 없다"고 하네스는 말했다. 하네스는 "이 사진들을 통해 '이 도시는 지속 가능한지' 묻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사진작가 마르코 가이오티는 멸종위기 동물과 사라지는 서식지를 포착했다. 아이슬란드 출신 라그나르 악셀손은 북극에서 개 썰매를 끄는 농민, 순록 떼가 지나가는 설원을 소개하며 "기후위기는 얼음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다"며 극권이 체감하는 기후 재난을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는 배우 김혜자씨가 해설로 참여했다. 김 씨는 "그냥 더운 게 아니라 펄펄 끓는 지구가 얼마나 두렵고 외로울지 무섭다"며 "지구의 목소리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세현 중구문화재단 이사장과 김길성 명예 조직위원장(중구청장)은 "기후변화는 통계나 ('아워 오션 콘퍼런스'나 '유엔 플라스틱 협약'같은) 국제회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미지로 직관을 건드리는 사진전은 더욱 많은 시민들과 기후 문제를 연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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