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황덕현 기후환경전문기자 = 도시의 하수구, 빗물이 흘러 내려가야 할 배수구는 막혔고 썩기 시작한 웅덩이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원형으로 모여 토론 중이다. 이미 머리까지 잠긴 이도 보이지만 당장 눈앞의 위기에 대응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물이 계속 차오르고 있음에도 격정적으로 회의만 할 뿐이다.
그 앞, 높은 의자 위엔 점잖게 차려입은 백인 남성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머리 스타일부터 빨간 넥타이까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꼭 빼닮은 이 인물은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하수구 속 논쟁을 내려다보고 있다.
스페인 출신 설치미술가 이삭 코르달(Isaac Cordal)의 '천천히 가라앉는 중(Slowly Sinking)' 작품 이야기다. 코르달은 정치 지도자들이 기후 위기의 현실을 외면한 채 무의미한 논쟁만 반복하는 모습을 꼬집고자, 실제로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 위험이 높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이 작품을 공개했다
이 작품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 때인 2017년 공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선언한 2016년에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 후 10년, 트럼프는 재집권했고 그간 국제사회의 기후대응 노력을 되돌리려는 모습이다.
이미 지구는 산업화 이전 대비 평균기온이 1.5도 이상 오른 상태로, 이른바 '지구 열대화' 단계에 진입했다.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매년 최소 7.6%씩 줄여야 하지만, 영국 글로벌 카본 프로젝트(Global Carbon Project)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년 대비 오히려 0.9%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상황은 '기후대응' 관점에선 더 참혹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신재생에너지는 비효율적이며 너무 비싸다"며 풍력발전과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지원 예산 삭감을 예고했고, 화석연료 산업 지원 정책을 다시 가동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사회의 기후대응 노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4%를 차지하는 국가이며, 중국(28%)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금 화석연료 산업에 힘을 싣는다면, 주요국 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공조는 더욱 어려워진다.
미국의 후퇴는 1기 행정부 당시 브라질과 호주 등 일부 국가가 기후대응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데 다소간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엔 유럽연합(EU)이 탄소국경조정제도 협상에서 한발 물러서는 등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은 더 어려워지는 모습이다.
국제사회 역시 문제 해결 없이 논의만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COP29(제29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막판까지 협상이 이어진 끝에 2035년까지 개발도상국에 매년 최소 3000억 달러의 기후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은 요원하다. 미국이 촉발한 관세 분쟁으로 인해 국제적 합의는 희석됐다.
한국의 기후대응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 독일 저먼워치가 발표한 2025년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한국은 67개국 중 63위로, OECD 38개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코르달의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며,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기후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다. 국내외 정치권이 계속 논쟁만 반복하는 동안 물은 천천히 차오르고 있다. 작품 속 차분한 상황은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시급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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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기후변화는 인류의 위기다. 이제 모두의 '조별 과제'가 된 이 문제는, 때로 막막하고 자주 어렵다. 우리는 각자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화 속 기후·환경 이야기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끌고, 나아갈 바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