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뉴스1) 강교현 기자 = 만취 상태에서 남자 친구의 집에 불을 질러 숨지게 한 40대가 항소심에서 감형받았다. 확정적 고의가 아닌 미필적 고의로 보인다는 것이 감형 사유로 작용했다. 하지만 선고 이후 여성단체는 "원심의 판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며 크게 반발했다.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양진수 부장판사)는 9일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된 A 씨(43)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A 씨는 지난해 5월 11일 오전 3시께 전북 군산시 임피면 한 단독주택에 불을 질러 남자 친구 B 씨(30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A 씨는 술에 취한 B 씨가 잠이 들자, 라이터로 이불에 불을 붙였으며, 범행 후 집 밖에서 이를 지켜보기도 했다.
A 씨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검거 당시 A 씨는 야외 화장실 인근에 만취 상태로 앉아있었다.
조사결과 A 씨는 함께 술을 마시던 중 B 씨로부터 폭행당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 등에 따르면 이들은 2019년부터 약 5년간 교제한 사이였으며, 평소 A 씨는 B 씨의 반복된 폭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B 씨는 2023년 특수상해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뒤에도 A 씨를 폭행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잠든 사이 불을 질러 살해해 그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유족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점 등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도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A 씨 측은 정당방위와 과잉방위, 심신미약 등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검사 역시 양형부당을 사유로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범행 당시 현실 검증력과 논리력, 판단력 등 자신의 행위가 가지는 객관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제출된 여러 증거를 살펴볼 때 피고인의 행위는 소극적인 방어를 넘어선 능동적인 공격의 의사를 보여 살인의 고의성이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안정한 충동 조절 상태와 무기력, 분노 감정 등으로 범행한 점,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확정적 고의가 아닌 미필적 고의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피고인에게 불리한 정상을 고려하더라도 원심형이 가벼워 부당하기보다 오히려 너무 무거워 부당해 보인다"며 원심을 깨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선고 이후 여성단체는 재판 결과에 대해 반발했다.
전국 여성단체 등으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전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정당방위 및 과잉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이번 판결은 '교제 폭력 피해자는 죽었을 때야 비로소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고 비판했다.
형법 제21조에 따르면 방위행위는 정황에 따라 그 형을 면제하거나 감경할 수 있다. 정당방위로 인정되면 형을 면제받을 수 있다. 다만 방위행위의 정도가 지나치다고 판단 돼 과잉방위로 인정되면 면책은 안 되지만 형을 감경받을 수는 있다.
단체는 "재판부는 5년간 지속해서 교제 폭력에 노출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국가기관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생존자의 방어권을 살인의 고의로 인정했다"며 "교제 폭력을 사적이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 온 국가 앞에서 생존자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은 정당방위와 과잉방위를 엄격하고 좁게 인정하고 있는 한국 사법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며 "남성 파트너에 의해 폭행당하거나 살해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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