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매년 3월이 되면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 현장에선 기자와 홍보팀 직원 사이에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홍보팀 직원들은 기자가 질문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심할 때는 사측 변호사가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미리 묻고 '불순분자'가 아니라는 게 입증된 후에야 입장을 허가받은 적도 있다.
주총장의 질문과 관련해 지금도 회자되는 사례는 2004년 삼성전자 주주총회다. 참여연대 소액주주의 이의 제기에 당시 의장인 윤종용 부회장은 "당신 몇 주나 갖고 있어"라며 격노했다. 결국 용역들에게 손발이 붙잡혀 밖으로 끌려 나왔고, 이 모습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며 기업 이미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젠 대놓고 쫓아내는 일이 없지만 소액주주들은 여전히 불청객이다. 자사 직원이나 우호적인 주총꾼을 불러놓고, 대본에 따라 발언권을 준 뒤 자기들끼리 박수로 안건을 통과시켜 10분 만에 끝내는 일이 지금도 많다. 의장의 "질문 있습니까"라는 말에 눈치 없는 주주가 정말로 "질문 있습니다" 한마디 던지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이유다.
소수 의견까지 고려할 순 없다는 기업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개미들이 경영 상황을 좁은 시각으로 보고 비논리적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이 주주에게 진정성 있게 답변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포기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절차적 정당성을 충족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무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20일 기자가 참석했던 한 주총에선 재무제표 승인 안건이 상정되자 한 주주가 발언권을 받았다. 그가 "원안대로 승인할 것을 동의합니다"라는 대사를 마치자 다른 주주들은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를 외쳤고, 안건은 우렁찬 박수로 통과됐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깬 건 한 주주가 계획에 없던 질문을 할 때였다. 다른 주주들은 일제히 "그냥 끝냅시다" "예의가 없네" 등 고함을 치며 제지했다. 과거에는 회사가 주주의 입을 막았지만, 지금은 주주가 다른 주주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제 더 이상 2004년과 같은 야만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 몇 주나 갖고 있어'의 사고방식은 좀 더 세련되고 찾기 힘든 형태로 변해 반복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텅 빈 공연장에서 매년 관객 없는 연극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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