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휩쓴 대형 산불을 보며,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LA 산불, 그리고 2019년 6개월 동안 지속된 호주 산불을 떠올려 보면 이런 재난이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3월 14일)
경북 산불이 발화한 날로부터 1주 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내놓은 발언이다. 기준금리 등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중앙은행 리더가 일견 경제와는 무관한 주제인 기후 재난에 대해 경종을 울린 이 발언은 영남권 산불을 계기로 재조명되면서 경제계 등의 주목을 받고 있다.
30일 한은에 따르면 이 총재는 지난 14일 연세대 개최 제7회 글로벌지속가능발전포럼(GEEF) 기조연설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총재는 "기후 변화는 더는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다가온 현실"이라면서 "우리 삶의 질을 직접 변화시키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가 산불 등 기후 재난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유는 앞으로 극단적인 기상·기후 이변이 세계 경제 전반에 상당한 부담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도 만일 기후 변화로 인해 특정 지역에 대규모 피해가 집중된다면, 가계와 기업의 손실이 이들과 연결된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북 산불을 비롯한 기후 재난은 국내에서 더 잦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유엔(UN) 산하 기상학 기구 세계기상기구(WMO) 등 전문가들은 세계 평균 기온이 미세하게만 상승해도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커진다고 분석했다.
산불의 경우, 높은 기온과 가뭄, 잦은 번개 등으로 인해 발화 직후 확산이 쉬워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 6차 보고서에서 2100년 지구 온도가 약 4도 오르는 고배출 시나리오 아래 세계 연소 면적은 50~70%, 평균 화재 빈도는 약 30% 증가한다고 추산했다. 기후 변화가 산불을 직접 일으키진 않지만, 과거에는 금방 진화됐을 산불을 더욱 오래 지속시키고 빨리 번지게 해, 산불의 빈도·범위가 늘어난다는 취지다.

그간 한국은 기후 재난을 직접 체감하는 경우가 여름철 태풍·집중호우 외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가 나날이 심해지면서 점차 기후 재난의 현장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EU) 기상 정보 기관인 코페르니쿠스기후변화서비스(C3S)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평균 기온은 섭씨 15.1도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관측 사상 처음으로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1.6도) 상승했다.
심지어 올해 1월 세계 평균 기온은 1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지난 2월은 역대 3위였다. 기온 조절에 중요한 해수면 온도(20.8도)와 대기 중 수증기량(1991~2020년 평균 대비 4.9% 증가) 역시 작년 관측 사상 가장 높고 많았다.
WMO 등은 올해도 세계 기온이 산업화 이전 평균보다 1.5도 내외 높아지면서 2024년, 2023년에 이어 역대 3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 중이다.
기후 재난은 환경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다. 피해 복구·보상에 따라 보험사 등 금융기관이 떠안을 손실만 아니라, 거시 경제 측면에서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자극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우려된다.
실제로 올해 1월 발생한 LA 산불은 미국 내 근원 인플레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지난 1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에 산불 영향이 0.04~0.09%포인트(p) 있었다고 추정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난해 기상 이변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바 있다. 작년 아프리카·남미 지역의 이상 기후로 인해 코코아(연간 +178%), 커피(+70%) 등 가격이 급등하자 수입 물가는 상방 압력을 받았고, 이를 원자재로 쓰는 가공식품 업체들의 가격 인상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커피 수입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08.1% 급등했다.

이처럼 기후 극단 현상은 국제 원자재 가격, 특히 농산물을 들썩이게 할 것으로 우려된다. 커피·코코아는 가격 급등에 따른 물가 파급 효과가 비교적 제한적이나, 비슷한 현상이 옥수수 등 주요 곡물에도 나타난다면 파문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총재는 지난 18일 연설에서 "최근 폭염으로 인한 온열 질환자 급증, 갑작스러운 극한 호우로 인한 서울 도심 및 산업 현장의 침수, 그리고 기온 상승으로 인한 농산물 재배지와 연근해 어종 분포 변화 등으로 인해 관련 상품의 가격이 급등했다"며 "기후 변화의 위협은 한은의 물가 관리에도 상당한 부담"이라고 평가했다.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려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제한할 여지도 있다.
최근 한은 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폭염·한파는 국내 고용률과 실업률 등 고용 지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겨울 한파의 경우에 고용 지표가 뚜렷이 악화했고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큰 타격을 입었다.
국제금융센터는 2025년 지구 온난화 전망 보고서에서 "원자재 수급 불안과 가격 상승에 따른 기후플레이션이 글로벌 인플레를 지속해서 자극하고 저개발국은 식량 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보건의료 비용, 소득 손실과 소비 위축, 인프라 손상, 노동 생산성 저하 등으로 글로벌 성장 동력이 약화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기후 변화에 따른 경제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면 우선 폭우·산불 등 극단 기상 현상에 대비할 인프라 확충이 요구된다.
이 총재는 "국내 댐 절반이 2040년까지 홍수 방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제기됐다"면서 "기존에 구축된 우리 인프라가 앞으로 다가올 기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선제적 보완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농가가 생산 가능 품종 변화에 대비하는 등 산업계의 적응 노력도 필요하다. 이 총재는 "명태는 2019년 이후 사실상 우리 연안에서 자취를 감췄고, 조기나 멸치 같은 기존 어종 어획량이 감소하고 있다"며 "어선과 어구를 현대화하고 새 양식 기술을 습득하는 등 빠르게 적응할 때"이라고 역설했다.
근본적으로는 적절한 기후 대응 정책이 시행돼야 한다. 기후 변화의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소재 국제기구 세계기후변화적응센터는 지난해 기후 극단 현상에 따른 글로벌 경제 손실이 3200억 달러(약 470조 원)에 달했다고 추정했다. 작년에는 남아시아 지역 홍수, 유럽과 북미 지역의 산불로 손실이 컸다면 앞으로는 어느 지역에 피해가 몰릴지 장담할 수 없다.
icef0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