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1) 김승준 기자 = 반도체 산업 위기감이 확산하며 연구·개발(R&D) 직군의 노동시간 규제를 풀어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에 장시간 노동, 과로 우려에 반론이 나오는 중이다.
유연한 업무 관리를 통한 생산성 재고·임금 절감이라는 가치와 노동자 건강권 보장 사이의 갈등은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미 유사 제도를 운용하는 미국과 일본에서는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과로, 실질 임금 감소, 제도 악용 같은 부작용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양국은 직무 관리 강화, 건강 보호 조치 시행 등 보완 장치가 도입됐다.
한국도 해외 사례를 참고해 생산성과 노동자 보호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은 1938년 공정근로기준법(FLSA)을 통해 저소득 생산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최저임금, 연장근로수당 의무화 제도를 도입했다.
고소득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회사와 협상력이 있어 보호가 덜 필요하다는 취지로 예외 규정이 도입됐다. 이렇게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WCE) 제도가 만들어졌다.
적용 직군은 △인사·예산권을 보유한 관리직 △법률·의료 등 고급 지식이 필요한 전문직 △경영 정책 수립에 참여하는 행정직 등이다. 이후 해당 직군의 저소득 노동자 보호 목적으로 임금 기준선이 생겼다.
현재는 관리·전문·행정직에서 연봉 3만 5568달러(약 5100만 원)를 받는 노동자는 WCE 대상이다.
아울러 연봉 10만 7432달러(약 1억5500만 원)를 받는 고액 보상직의 사무직 노동자는 일부라도 관리·전문·행정직무를 정기적으로 수행하면 WCE를 적용받는다. 예를 들어 생산직이더라도 연봉 기준을 만족하고 부서 인력 업무 일정 관리를 하면 된다.
이 제도는 '기준 임금의 물가 자동 연계' 같은 장치가 없다. 그래서 실질 임금 감소로 인한 사기 저하, 구매력 감소 등의 부작용이 나왔다. 2024년 미국 노동부는 기준 임금 상향과 물가 자동 연동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텍사스 연방 법원의 판결로 무산되기도 했다.
또 직무 요건 조항 악용에 따른 법적 분쟁도 종종 일어난다. 2023년 한 물류회사가 주문 처리 업무를 주로 하는 직원에게 월 1회 보고서 작성을 맡겼다. 그리고 월 1회 작성하는 것이 전략적 기획 업무에 해당한다며 WCE에 따라 추가 근로 수당을 주지 않았다. 결국 이 분쟁은 재판으로 넘어가 회사가 패소해 미지급 수당의 2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었다.
미국의 법률 컨설턴트들은 이런 분쟁을 방지하려면 △정기적인 직무 분류 검토 △여러 직무 수행시 업무 시간 배분 기록 △면제 업무 비중 정량화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일본에서는 2019년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가 도입됐다. 유연한 업무 관리를 통한 생산성 향상이 목적인 이 제도는 금융상품 개발, 외환 딜러,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연구개발 등 5개 분야의 연봉 1075만 엔(약 1억 220만 원) 전문직이 대상이다. 적용 노동자는 원칙적으로 법정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받지 않고 초과근로수당도 없다.
이 제도를 운용하려는 회사는 노사위원회 5분의 4 이상의 찬성과 개별 노동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 제도는 '장시간 노동 합법화'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노사 동의 규정이 안전장치로 있어도 일본 문화에서는 형식적으로 흘러가기 쉽다는 것이다. 도입 대상 노동자는 더 많은 초과 근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이런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 방지 조항을 운영하고 있다. 의무 조항으로는 △사내 체류 시간·외부 근무 시간 측정 및 합산 관리 △연간 104일 이상 휴일, 4주당 4일 연속 휴일 보장 등이 있다.
또 △퇴근 후 11시간 휴식 보장 및 야간 근무 4회 이내 제한 △월 100시간, 3개월 240시간 근무 제한 △연 1회 이상 연속 2주 휴가 제공 △월 80시간 초과 근무 시 건강 진단 등 4개의 선택적 조치 중 1개 이상을 이행해야 한다.
최근 일본 정부는 고도프로페셔널 제도 대상을 인공지능(AI)과 같은 경쟁이 치열한 첨단 분야 종사자로 넓히고 기준 연봉을 800만 엔(약 7610만 원)으로 낮추려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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