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어느 피아니스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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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진성훈 국제부 부국장 = 러시아 중부 탐보프에서 피아니스트 아버지와 음악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17살에 연주시간 2시간을 훌쩍 넘는 쇼스타코비치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전곡을 비범하게 소화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정도 해야(하니) 바로 그 차이콥스키가 교수로 있었다는, 그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다. 아직 17세였다.

전쟁이 싫었다. 반전(反戰) 동영상 4개를 만들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손으로 그린 'FBI' 배지를 들고 'X-파일'의 멀더 요원 흉내를 냈다. 명대사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를 외치면서. 구독자 수가 5명뿐이었던 게 무리는 아니다.

그 5명조차 다 봤을 것 같지 않은 이 동영상들이 테러 활동을 부추긴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러시아 극동의 외딴 감옥에서 음식은 물론 물도 거부하는 단식 투쟁을 하다 숨졌다. 40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둔 지난해 7월 어느 날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함께 다녔던 음악가는 늘 진실과 자유의 편이었던 동료로 추억했다.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정치범들 사이에서 묻힐 뻔한 외로운 죽음이 서방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한국일보 베를린 특파원을 제외한 어느 국내 언론도 주목하지 못했다. 그해 8월엔 사이먼 래틀, 다니엘 바렌보임,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저명 클래식 음악가 수십 명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추모하는 공개 서한을 독일 신문에 실었다.

"그를 기억하겠다"는 이 음악가들 중엔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경도 있다. 쉬프는 전쟁과 관련한 '푸틴'의 언행 등에 분노하며 '러시아'에서 예정된 모든 연주회를 취소했다. 쉬프는 '푸틴'이 "믿을 수 없는 괴롭힘"을 자행하고 있다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추악함을 가져왔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독일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도 '러시아'에서 예정된 연주회를 모두 취소하며 클래식 음악계의 보이콧 연대에 참여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번져가는 공포를 봤을 때 더는 공연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실, 쉬프와 테츨라프의 보이콧 대상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쉬프와 테츨라프에는 죄송하게도, 작은따옴표 안의 푸틴과 러시아는 각각 트럼프와 미국을 오기(誤記)한 것이다. 이렇게 잘못 적어도 알아채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탐보프가 아닌 녹스빌에서 태어나 줄리어드 음대를 나온 미국인 피아니스트이고, 숨을 거둔 극동의 감옥이 엘살바도르의 외주 교도소(트럼프가 해냈다!)였다고 썼어도 몇몇은 믿었을지 모른다.

"푸틴이 죽였는데 왜 트럼프를 욕해", "가짜뉴스네" 따질지 몰라 덧붙이자면, 음악가들이 지금의 미국에 분노하는 이유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트럼프의 태도가 한몫하고 있으니 아주 억울할 일은 아니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건 푸틴이다. 3년간 양쪽에서 130만명 정도가 죽거나 다친 걸로 추정되는 비극이다. 어서 전쟁을 끝내고 우크라이나의 광물을 손에 넣길 원하는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를 윽박지르고, 푸틴을 구슬렸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시작했고, 젤렌스키는 적법한 대통령도 아닌데 정장도 안 입고 백악관에 오면서 미국에 감사할 줄도 모른다고,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3000억달러나 지원했다고 부풀린다. 그런 게 진짜 가짜뉴스다.

음악가들이 등을 돌린 미국이 어떤 곳이었나.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혁명과 유럽의 세계대전 포화를 피해 떠난 수많은 천재 음악가를 따뜻하게 품어줬던 나라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라흐마니노프도 미국으로 건너가 피아니스트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그렇게 이민자들 덕에 미국은 경제·군사 대국에 이어 유럽 부럽지 않은 문화예술 중심이 됐다.

마침 쉬프는 지난달 말에 내한공연을 가졌고, 테츨라프는 며칠 후면 서울과 부산에서 멋진 음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미국 공연 다 없앴다니 더 자주들 오면 좋겠다.

내한공연 얘기까지 마치고 이제 '그'의 이름을 적는다. 쟁쟁한 대가들에 묻힐까 마지막까지 미루었다. 파벨 쿠슈니르. 그의 생전 연주 영상이 몇 개 올라 있는 유튜브 검색에는 영어 이름(Pavel Kushnir)이 좋지만, 모국어인 러시아어로도 적어 둔다. 기억하기 위해. Павел Кушни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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