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뉴스1) 홍수영 기자 = "지금까지도 가슴에 사무치죠."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 내 고(故) 김덕수 씨의 비석 앞에서 딸 김술생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의 품 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
4·3희생자 고 김덕수 씨는 김술생 할머니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끌려가 주정공장 수용소에 수감됐다.
당시 6살 즈음이었던 언니 김갑세 할머니는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주정공장 수용소로 면회하러 갔지만 그때 본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수용소에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후 아버지는 육지에 있는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춘자 할머니는 4·3 당시 세 살배기 어린 동생을 잃었다. 할머니, 부모, 형제를 모두 떠나보내야 했지만 한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했다. 매년 4·3평화공원을 찾는 그의 아들조차 최근에야 어머니의 가족 5명이 희생됐다는 자세한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아침 일찍이 묘역을 찾은 이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고모 고 이춘녀의 비석을 정성스레 닦았다. 4·3평화공원을 올 때마다 가족들의 비석을 닦아 마음을 전해온 가족들만의 의식이 됐다.
이 할머니는 "아버지(고 이계봉)는 당시 20대에 불과했는데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됐다"며 "4~5살쯤이라 너무 어려 잘 모르기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80세가 된 이 할머니는 지난해서야 아버지 제사를 처음 가봤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대를 잇겠다고 호적에 올린 양자가 제사를 지내왔지만 교류가 없는 탓이었다.
그의 아들은 "희생자의 양자가 있으면 유족 대표가 되더라. 이 때문에 막상 친딸은 유족으로서의 보상, 정보전달 등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있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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