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19년 4월 15일, 일본 군경이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은 후 무차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앞서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했다. 특히 수원 지역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조직적이고 격렬했다. 3월 31일에는 향남면 발안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시위 군중에 의해 사망하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일제는 만세 시위를 주도한 세력을 색출하고 본보기로 삼아 보복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적인 총격과 방화로 인해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길 속에서 탈출하려던 주민들마저 칼에 찔려 죽었으며, 같은 날 인근 고주리에서도 6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은 민가 30여 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사건 직후, 일제는 조직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현장을 통제하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으며,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함구를 강요했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W. 스코필드와 미국 선교사 민니 B. 캐슬러 등의 용기 있는 증언과 사진 촬영을 통해 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실이 국제사회에 알졌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형식적인 군법재판을 열었다. 하지만 학살 책임자인 아리타 도시오 일본군 아리타 중위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일제가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뼈아픈 역사로 기록이다. 화성시는 매년 4월 15일,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희생된 29명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를 개최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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