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우리는 과거 고도성장에 너무 익숙해 내년 1.8% 성장이 위기이고 매우 힘들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 실력이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고 기존 산업에 의존해 새 성장 동력이 되는 산업을 키우지 않았으며 고령화 속 해외 노동자도 안 데려왔다. 내년 성장률 1.8%가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중략)… 지난 10년간 정부가 가장 뼈아프게 느껴야 할 것은 신산업을 도입하지 않은 것이다. 창조적 파괴에 필요한 고통과 갈등을 감내하기 어려워 이것저것 다 피하다 보니 신산업이 도입되지 않았다."
4년(2023~2026년) 연속 2% 이하라는 초유의 저성장이 전망된 데 대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내놓은 평가다. 연속 1%대 성장은 과거 뼈아픈 실책에 따른 결과이며, 미래 한국 경제의 뉴노멀이라는 취지로 풀이된다.
2000년대 초반 5% 내외였던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여 년간 거듭 하락해 이제 1%대를 눈앞에 뒀다. 심지어 15년 뒤에는 0%대 진입이 우려된다.
잠재성장률은 경제 발전과 성숙에 따라 자연스럽게 꺾이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저성장과 잠재성장률 하락을 우려하는 것은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주요국 중에서도 '추락'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 전후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눈에 띄게 악화하면서 잠재성장률은 더욱 떨어졌는데, 이는 한국이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고통과 갈등을 수반한 구조개혁을 외면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총재의 지적이다.
경제의 기초 체력으로 비유되는 잠재성장률은 모든 생산 요소를 동원해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치를 가리킨다.
잠재성장률이 낮아진 경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최선을 다해 일해도 피로(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만 쌓일 뿐 실제 살림은 별반 나아지지 못하는 가정과 같다. 경제에 저성장 구조가 고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재정을 풀고 금리를 내려도 성장보다 부작용만 커진다.
한국의 기초 체력 저하는 코로나19 유행 초기인 2020~2021년 전후로 뚜렷이 가시화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주요 7개국(G7) 막내 격인 이탈리아를 넘어서고(2020년) 국가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를 기록하면서(2021년) 최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인구 감소, 저출산·고령화 가속, 산업 경쟁력 저하 등 내리막을 예고하는 조짐 또한 나타났다. 이른바 '피크 코리아' 현상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한은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 추정치는 △2001~2005년 5.0% △2006~2010년 4.1% △2011~2015년 3.4% △2016~2020년 2.6% 등 꾸준히 낮아졌다. 특히 2021~2023년 2.1%, 올해부터 내후년까지 3년 동안 2.0%, 올해부터 2029년까지 5년 동안 1.8%로 내려앉았다.
이에 향후 5개년 잠재성장률과 동일한 내년 1.8% 성장 전망이 '우리 실력'이라고 이 총재는 꼬집은 것이다.

고소득 국가의 성장 둔화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하이 인컴 트랩(high income trap)' 개념도 있다. 경제가 선진국 반열로 올라서면 높은 임금에 제조 업체는 해외로 향하고 고학력 청년이 구직난을 겪는 가운데 고령화로 일하는 인구가 줄면서 성장률이 낮아지는 경향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최근 미국 경제를 보면 저성장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미국은 우리나라 명목 GDP 15배에 달하는 덩치에도 지난 수년간 양호한 성장을 이어가면서 통념을 깨고 있다. 앞서 한은 뉴욕사무소는 올해 미국 경제가 견조한 소비·투자를 유지해 호조세를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고, 1월에도 양호한 성장 흐름을 계속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이대로는 성장률 0%의 수축 사회 진입마저 우려된다는 점에서 경각심이 높아진다. 한은에 따르면 우리 경제가 전반적으로 지금 같은 추세를 이어간다면 2040년대 잠재성장률 0%대를 피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2030~2034년 1.3%, 2035~2039년 1.1%에서 2040~2044년 0.7% 등 급브레이크를 밟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는 국제적으로도 빠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추정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잠재성장률은 2000~2007년 OECD 7위인 3.8%였지만 2020~2030년 1.9%로 내려오고 2030~2060년에는 꼴찌인 0.8%까지 주저앉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미국(1.5→1.0%) △일본(0.5→1.1%) △선진국 평균(1.3→1.0%)과 비교해 매우 빠른 하락세다.
지난해 12월 한은은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을 두고 "경제 혁신 부족, 자원 배분 비효율 등으로 총요소생산성 기여도가 낮아지는 가운데 인구 구조 변화와 경제 성숙에 따른 투자 둔화 등으로 노동·자본 투입 기여도까지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요약했다.
잠재성장률은 노동투입, 자본투입, 총요소생산성 등 크게 3가지 요인으로 구성된다. 총요소생산성은 주로 노동·자본 등 물적 투입 외의 제도·기술수준·자원배분 효율을 비롯한 무형의 요인이 생산에 미치는 효과로 해석한다.
자본투입 둔화는 경제 성숙기 진입에 따른 투자 둔화 등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노동투입의 경우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미래 잠재성장률을 낮추는 핵심 중 하나이지만, 대다수 선진국도 근로 시간 단축·임금 상승 등에 따라 노동투입 기여는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총요소생산성 둔화는 얘기가 다르다. 경제 체제 전반의 효율성이라고 볼 수 있는 총요소생산성은 2001~2005년에는 잠재성장률에 2.1%포인트(p), 2016~2020년에는 1.5%p를 기여했으나 2021~2023년, 2024~2026년에는 각각 0.7%p를 기여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상태가 확연히 나빠졌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총요소생산성을 비교하면, 원래 평균적으로 자본투입 기여도의 90% 정도였으나 2020~2024년에는 60%에 그쳤다.
한은은 생산성 하락의 주된 원인으로 △구조조정 지연 △혁신기업 생산성 정체 △미·중 갈등 등 지정학 리스크 심화 등에 주목했다.
특히 "코로나 이후 불충분한 고용 재조정, 한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지연으로 인한 자원 배분 비효율성 증대는 생산 요소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해 총요소생산성을 낮추는 주요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주로 구조조정의 부재를 생산성 악화 배경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즉, 한국 경제가 자본·노동 투입량에 의지한 외형적 성장에 상당 부분 한계에 부딪힌 가운데 이를 보완할 생산성 개선(구조조정)에는 코로나 전후로 유독 미흡한 모습을 보이면서 잠재성장률이 내려앉고 있다는 얘기다.
한은은 총요소생산성이 2030년대까지 코로나19 기간 이전(자본투입 기여도의 90% 수준)으로 회복하도록 노력한다면 잠재성장률이 2030년대 1.8%로 기존 추정치 대비 0.5%p가량 높아지고 2040년대 후반에는 1.3%로 약 0.7%p 높아질 것이라고 추산했다.
노동투입을 개선해도 잠재성장률은 높아지지만, 총요소생산성 회복보다는 효과가 더딜 것으로 분석됐다. 예컨대 출산율 제고를 통한 노동투입 개선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인적 자원으로 투입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2030년대 초반에는 효과를 거의 내지 못한다. 2040년대 후반~2060년대에야 0.1~0.2%p의 효과를 발휘한다.

총요소생산성 개선이라는 말을 쉽게 풀면 경제에 돈과 인력을 투입했을 때 나오는 생산물의 가치가 이전보다 더 높아지도록 한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기존 산업, 익숙한 방식, 지금껏 유지해 온 제도 등을 고수해서는 달성할 수 없다.
한은이 저성장 문제와 관련해 구조조정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다. 산업구조·노동시장·교육·수도권 집중 등 곳곳에서 기존 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13년 한국을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했던 글로벌 자문 업체 맥킨지는 2023년 "냄비 속 끓는 물의 온도가 더욱 올라갔다"고 우려한 데 이어 최근 보고서에서는 "개구리에 '뜨거운 물을 끼얹어서라도' 한시바삐 탈출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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