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김규빈 기자
"질병의 원인이 있다면 대개 제거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이고,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만들어야죠."
강희경 전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3기 비상대책위원장은 전날(10일) 의정갈등 1년을 되돌아보며 이같이 진단했다.
강 전 위원장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의료 공백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었던 의료 성적은 평균으로 수렴하고 있다"며 "치료가 늦어진 환자들, 불안에 떤 국민들, 직업 안전성을 위협받은 의료계 종사자들 모두 피해자"라고 말했다.
강 전 위원장은 지난해 5월 3기 비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전 집행부가 '중재' '집단행동'을 내세웠다면, 3기는 '바른 의료 정책 제시'를 목표로 삼았다. 모든 자료를 모아 의료 상황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의대 교수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 교육정상화 등을 논의하기 위해 시민단체, 의료계 전문가, 정부 등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특히 지난해 10월에는 의료개혁을 주제로 대통령실·정부와 의사단체 간 첫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다음달 초에는 '필요 의사 수 추계 연구 공모' 모집결과를 토대로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사직 전공의들은 왜 임상현장을 떠났는지, 필수·중증 의료 등 특정과를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토론과정에서 나온 논의들은 자연스럽게 '의료 현장의 목소리는 그간 왜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강 전 위원장은 보건의료 정책 결정 과정과 노후화된 의료시스템에 답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부와 의료계가 협력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모델로 세계보건기구(WHO), 미국 유엔(UN)의 '거버넌스 체계'를 제안했다.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을 설정하되, 구체적 실행 방안은 의료계의 조언을 받아 설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를 토대로 독립적인 의료정책위원회를 신설하거나 전문가 협의체를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진국의 경우 정부와 의료계 간 협력 모델이 잘 정착해 있다. 미국은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에 보건의료 인력의 양상과 배치 등을 담당하는 BHW(Bureau of Health Workforce)가 있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독립적이며 의료 전문가들이 정책 수립과 실행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은 건강보험공단과 의료협회가 공동으로 정책을 결정하며, 일본 역시 정부가 방향을 설정하면 구체적인 운영은 의료 전문가들이 담당하는 구조다.
이처럼 안전성, 전문성, 중립성이 담보된 기구가 마련되면 의대 정원 증원, 감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 전 위원장은 "모든 회의의 의사록이 상세히 작성돼야 하며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며 "몇 명을 증원해야 하는지는 과학적으로 추계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추계로 얻는 결과는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닌, 수백-수천 명의 오차범위를 신뢰구간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숫자를 묻는 질의에는 "각 의과대학교에서 '교육 가능한 수준'에서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시스템이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열린 자세와 상호존중이 없으면 유지가 힘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의정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정부와 의료계, 정부와 국민, 의사와 환자, 교수와 전공의 그리고 의료계 내부까지 서로에 대한 존중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며 "본인이 대우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방을 대우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 전 위원장은 의정 사태가 이어진다면 초과 사망 증가와 의사 인력난이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초과 사망이란 평소라면 생존했을 환자가 사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의료진 공백으로 인해 환자가 적절한 치료 기회를 놓쳐 건강이 나빠진 경우 벌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로는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수가, 의료사고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법체계를 꼽았다.
그는 소아 투석 환자 등을 돌보는 소아 신장 분과 권위자다. 이 분야 전문가는 국내에 30여 명 남짓. 특히 서울대병원에는 소아청소년 콩팥센터가 있고, 유일하게 소아 전용 인공신장 투석실(소아청소년 콩팥센터)이 있다. 연일 몰려드는 환자 탓에 강 교수는 일주일에 절반은 외래진료를, 한 달에는 600명이 넘는 환아를 진료한다.
하지만 지난해 12월까지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 콩팥병센터에는 단 두 명의 교수만 근무했다. 비정상적인 수가체계 때문이다. 현 의료 지불체계는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업무량, 비용, 위험도 등에 점수를 매겨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인데, 의사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행위보다는 MRI 검사와 같은 항목들이 높은 점수를 얻게 된다. 문제는 일부 상담, 진찰 등 의료행위는 수가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 교수는 "행위별 수가제 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의료행위도 많아 일일이 수가를 책정하고 매년 조절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기본인 진찰료를 현실화해야 한다"며 "행위별 수가제의 폐해가 심각하므로 이를 고집하기보다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공급할 수 있도록 수가체계를 혁신해 소위 '필수의료' 의료진의 고용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수·중증 의료 강화를 위해서는 의사들의 '사법 리스크'를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치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나쁜 결과가 도출될 경우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며 "대학병원을 떠나는 이유는 소송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의사의 의료 행위 중 과실 여부는 의사가 가장 잘 안다"며 "법원에서 의료 분쟁을 다룰 때는 적어도 의료 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과거의 의료 시스템은 전공의 인력을 값싸게 이용할 수 있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강 전 위원장은 사직 전공의가 복귀해 이전의 의료시스템에서 수련받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제는 전공의 인력 없이도 상급종합병원의 진료가 적절히 유지될 수 있는 인력구조와 수가체계를 갖추고, 전공의는 '수련'을 위해 고용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며 "진료량을 줄여 의료의 질을 유지해야 하고 만약 진료량을 줄이지 못할 경우 대체인력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강희경 전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원장 프로필
△1971년 출생 △1996년 서울의대 졸업 △서울의대 석·박사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소아신장분과 전임의 △미국 하버드 의대 Beth Israel Deaconess 메디컬센터 이식연구소 연구전임의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 교수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3기 위원장
rn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