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강민경 기자 = 18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4시간 30분 진행된 미국과 러시아의 첫 고위급 종전 협상은 러시아의 판정승으로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로 얼마나 양보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탐색전'에서 러시아는 제재 해제 등 미국이 제시한 당근을 마음에 들어 하는 분위기다. 러시아 대표단을 이끈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매우 실용적인 대화였다"며 "미국 측이 우리 입장을 더 잘 이해했다"고 만족했다.
전쟁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를 배제했다는 점에서 미국이 러시아에 한 수 접어주고 시작한 협상이었다. 친우크라이나 성향이 강해 러시아 측의 '기피 인사'인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특사도 회담에서 빠졌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 측 대표단을 이끈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러시아와 4가지 원칙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우선 미·러 양국은 워싱턴과 모스크바에 있는 각자의 대사관에 직원을 복귀시키는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특히 대러시아 경제 제재 해제 가능성도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라브로프는 회담 후 "상호 이익이 되는 경제 협력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데 있어 (미국 측의) 강력한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루비오도 "갈등을 끝내려면 모든 당사자가 양보해야 한다"며 부정하지 않았다.
루비오는 회담 후 유럽 주요국 외교장관들과의 통화에서 러시아와의 대화 내용을 설명했는데, '제재 완화'를 포함한 러시아 측의 요구사항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루비오는 라브로프를 미국의 제재 목록에서 지울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직 그 정도 수준의 대화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회담에 배석한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국부펀드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 회장은 러시아와 미국이 북극 등에서 공동 에너지 합작투자 법인을 만들자는 제안까지 했다.
무엇보다 트럼프 측의 친러시아 발언이 더 노골화됐다. 트럼프는 회담에서 소외된 데 반발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매우 실망했다"고 공개 면박을 줬다.
트럼프는 3년 동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면서 "우크라이나는 협상 참석을 바라지만 사람들은 (우크라이나가) 너무 오랫동안 선거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까지 언급했다.
젤렌스키 정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위험한 발언이다. 젤렌스키의 임기가 지난해 종료됐는데도 계엄령을 근거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며 정통성을 부정하는 러시아 측 주장과 판박이다.

북한 문제도 논의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는 이날 플로리다주 마러라고에서 종전 협상 관련 질문을 받고 "많은 북한군이 죽었다. 그들은 싸우러 왔다가 상당수가 소멸했다(wiped out)"고 답했다. 미국이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의 최전선에 파견된 북한군의 철수를 요구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다만 푸틴과 트럼프의 대면 회담에 관한 구체적인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러시아 측은 이달 말 미·러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작다고 발언한 반면, 트럼프는 푸틴과의 이달 회담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아마도"라고 답했다.
러시아는 노련한 외교 베테랑을, 미국은 비교적 신참을 내보냈다. 양측 대표단의 면면으로 보면 회담 시작 전에 이미 협상 결과가 정해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에선 21년 차 외교 사령탑인 라브로프와 함께 주미대사 출신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담당보좌관,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국부펀드 회장이 나섰다. 러시아 독립언론 모스크바타임스는 이를 두고 "헤비급 구성"이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푸틴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회담에는 러시아 해외정보국(SVR) 수장인 세르게이 나리슈킨도 배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옛 소련 시절 푸틴과 함께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근무하며 친분을 다진 인물이다.
반면 미국 대표단을 이끈 루비오는 상원의원 출신이며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는 최근 러시아 억류 미국인의 석방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성사 등의 성과가 있으나 외교 경험이 없는 부동산 사업가 출신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러시아에 끌려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평가가 나온다.
벨라루스 주재 영국 대사를 지냈던 나이절 굴드데이비스 영국 국제문제전략연구소(IISS) 선임연구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이 모든 협상은 러시아에 매우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며 "이걸 협상으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항복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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