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 없는 권력의 위험…의대 증원 논란이 남긴 교훈 [변기용의 교육 포커스]

편집자주 ...필자는 1991년 제35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후 경북대 교무과를 시작으로 교육부의 정책 기획 부서에서 16년간 근무하면서 실제 정책을 입안했다. 2002년부터 3년간 OECD 교육국(프랑스 파리)에서 상근 컨설턴트로 국제적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수행했다. 2008년에는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현재 고려대 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한국근거이론학회 회장, 한국교육행정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본문 이미지 - 변기용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 News1
변기용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 News1

변기용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고등교육정책연구소장 = 미국의 건국자 중 한 사람인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견제와 균형이라고 강조했다. 견제와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권력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권력으로 변질돼 부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특히 지난 1년간 의대 정원 증원 정책 과정에서 나타났던 정부와 그 뒤에 있었던 선출 권력의 오만함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밀어붙이기'식 접근 고수…의료계 반대 힘 실어줘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정책 추진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 원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지역 간 의료 격차 해소와 필수 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라는 해묵은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히 고려될 수 있는 방안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위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 2025년 2000명의 의대 입학정원을 증원하고 2035년까지 의사 1만명을 확충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대통령도 발표한 방안에 대해 일고의 협상 여지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힘으로 밀어붙이기'식 접근만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정부와 의료계 간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와 선출 권력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사회적 합의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무시한다면 해당 정책의 정당성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정당성의 약화는 결국 이를 반대하는 이익집단인 의료계의 반대에 힘을 실어주게 됐다.

본문 이미지 - 텅 빈 의과대학 강의실. /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텅 빈 의과대학 강의실. /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의대 정원 확대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의료계

이 과정에서 의료계가 보인 행태에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법조계와 함께 가장 강력한 전문가 권력 집단 중 하나인 의사 집단은, 의정(醫政) 갈등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강경한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의료계의 우려와 반발은 타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초래한 데는 의대 정원 확대 논의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려는 의료계의 태도에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다. 정부가 제시한 의대 정원 증원과 필수 의료 패키지 강화 방안에 문제가 있다면 의료계도 환자, 관련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공론의 장에서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정부와 국민들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불합리한 의대 정원 증원 결정 과정을 빌미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대책과 관련한 논의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행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료 서비스 제공 중단까지 불사하는 태도는, 견제받지 않는 전문가 권력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해관계 따라 '과학적 근거' 자의적으로 악용

의정 갈등 과정에서 생산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과학적 근거'라는 개념이 각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추진한 정책"이라고 하거나, 이에 대해 의료계가 "정부가 의대 증원 정책의 근거로 제출한 자료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좋은 예에 해당한다.

과학적 연구 결과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원을 추정하는 시뮬레이션 모형에서 어떤 변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한 연구 결과가 제시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절대적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반박의 여지가 존재하는 잠정적으로 타당한 결과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재 정부와 의료계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특정 연구 결과나 견해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면서, 문제의 본질과 관련된 실질적 논의를 진행하기보다는 정치적 진영 싸움으로 논의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적 근거의 '근거'는 단순히 자신의 입맛에 맞는 특정한 연구 결과를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 간의 개방적 논의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합리적으로 줄여나가는 과정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의대 정원 증원 논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논의의 핵심은 사라지고, 틀짓기 논리에 따라 누가 옳고 그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싸움만 남아버렸다. 이렇게 되는 경우 논의의 성격이 "누구의 어떤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가"가 아니라, "나는 옳지만 너는 틀렸다"라는 이분법적 논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본문 이미지 -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와 학생, 서울아산병원 사직 전공의 등이 지난해 12월 18일 낮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아산병원에서 윤석열 정부의 2천명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잘못된 의대증원으로 눈 앞에 다가온 대한민국 의료와 의료교육의 파국을 막고 의료정상화를 만들기 위한 시위라고 밝혔다. /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와 학생, 서울아산병원 사직 전공의 등이 지난해 12월 18일 낮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아산병원에서 윤석열 정부의 2천명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잘못된 의대증원으로 눈 앞에 다가온 대한민국 의료와 의료교육의 파국을 막고 의료정상화를 만들기 위한 시위라고 밝혔다. /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견제받지 않는 권력 집단 된 특정 전문가 집단

사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료 개혁의 핵심은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와 필수 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독선적인 의대 정원 정책 추진과 이에 대한 의료계의 극단적 반발이 서로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작 필요한 의료 시스템의 개혁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정부가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정책을 결정하는 현실뿐만 아니라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의료계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는 정책 결정 구조 역시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는데 중대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이 힘을 가질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카르텔적 권력 구조의 전형적인 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정치권력이 과도한 중앙집권적 통제력을 행사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것처럼,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특정 전문가 집단들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의대 정원 증원, 의약 분업 등 의사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 번번이 좌절돼 온 그동안의 경험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문제는 특정 전문가 집단에 의해 정부 정책이 결정되는 이러한 기형적 구조가 지속될 경우 국가 정책이 더 이상 국민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비민주적 구조가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견제와 균형 무너지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대통령이든 전문가 집단이든,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강화하고, 각 집단의 권력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공공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파와 독립적인 사회적 공론화 기구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이해관계자 간 합의를 이뤄나가는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견제와 균형이 무너질 때,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이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멈추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진정한 의료 개혁을 이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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