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폭도 아들', '빨갱이 아들'이라고 할까 봐 아버지 이름도 함부로 말 못 하고…"
28일 오후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24회 제주4·3 증언 본풀이 마당에서는 4·3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평생 연좌제에 시달려 온 임충구 씨(81)의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됐다.
임 씨에 따르면 임 씨의 아버지 임원전 씨는 4·3 발발 초기 행방불명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공무원으로 일하던 20대 청년의 안타까운 끝이었다. 이때는 아들 임 씨가 5살도 채 안 된 때였다.
임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지만 어느 날 '어머니 말 잘 듣고 누이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라'라고 말하며 뒤돌아서는 모습이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 마지막 모습"이라고 회상했다.
이후 임 씨는 남의 집에서 남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지내기를 반복했다. 그는 "멸족만은 피하려 했던 어머니의 사투가 절 살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 씨가 7살이던 해, 임 씨 어머니는 서귀포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하고 말았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끌려가 희생된 것이다.

임 씨는 "천애 고아가 된 뒤 부모의 죽음을 놓고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를 물어보는 게 금기어였던 시절이 오랫동안 이어졌다"며 "그 긴긴 시간이 제게는 정말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보통고시'로 불리던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끝내 발령받지 못해 포기해야 했던 일, 사업을 하던 30대 때 해외 출장 준비 과정에서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던 일, 해외 출장지에서 '이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 기록해 제출하라'는 내용의 쪽지를 받았던 일, 누이동생의 남편이 결혼 직후 2개 공무원 임용시험에 동시 합격했음에도 그 역시 끝끝내 발령받지 못했던 일까지.
그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레드 콤플렉스'의 감옥에 갇혀 버린 꼴이었다. 사방이 막힌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압박감이라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면서 "무엇보다 대물림되는 연좌제는 정말 커다란 고통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하늘만 바라봤던 생각이 난다"고 토로했다.
55살 때였던 1999년, 그는 행방불명됐던 아버지의 소식을 극적으로 접했다. 수형인 명부가 발굴되면서 아버지가 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제주국제공항에 총살당한 뒤 암매장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4·3 수형인 특별재심에서 임 씨는 아버지의 무고함을 다시 한 번 호소해야 했다. 검찰이 임 씨 아버지에 대해 4·3 희생자로서 결격 사유가 있다고 주장해 사상 검증 논란을 낳은 탓이었다. 다행히 재심 결과는 무죄였다.
임 씨는 "2023년 1월 가족 모두 함께 4·3평화공원 봉안실에 계신 아버지께 참배하며 무죄 확정 판결문을 올렸다"면서 "바라건대 망인을 두 번 죽이고 유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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