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전호제 = 이제 중학생이 되는 딸과 대화를 해보니 귀신에 대해 궁금해했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봐도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을 귀를 막으면서도 즐겨 보곤 했으니, 이해가 갔다. 2년 전에 부친상을 치렀는데 딸이 영정을 든 경험이 있어서 삶과 죽음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예전엔 누군가 돌아가시면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도 흔했다. 30년도 더 된 얘기지만 당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시골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마당에는 천막이 펼쳐지고 큰 등불도 달렸다. 천막 아래엔 조문객으로 가득하고 할머니가 계시던 방은 분향소로 변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고인을 모시는 길에 나는 영정을 들게 됐다. 장지로 가는 길은 논과 밭 사이를 걷는 긴 여정이었다. 가족 묘지에 이르자 큰어머니가 커다란 양은솥을 걸고 육개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상여를 진 분들과 지친 모두에게 뜨거운 국과 밥은 기운을 차리기에 딱 좋았다.
숙주, 토란대, 고사리, 대파가 충분하게 들어가고 빨간 고추기름이 가득한 육개장은 원래 개고기를 먹다 소고기를 사용하게 된 음식이다. 육개장이 장례식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이유는 고추기름의 붉은 색이 악귀를 물리치는 기운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맛과 영양에서 보면 장례는 체력이 대단히 소모되는 행사이기도 하다. 3일에서 5일까지 이어진 일정을 따르려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 고기와 각종 야채를 한꺼번에 먹기 좋은 육개장은 이상적인 음식의 조건을 갖췄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바로 이동하는 것으로 죽음은 쉽게 묻히곤 한다. 예전에는 '근조'라고 쓰인 노란 등을 집 대문 앞에 걸기도 했다. 또 사자상(使者床)이라고 집에서 장례를 지낼 경우 저승사자를 위해 차린 밥과 노잣돈이 대문밖에 놓이기도 했다.
장지에서 직접 힘들게 육개장을 끓였던 예전과 비교해 보면 먹거리 준비는 간편해졌다. 상조회사에서는 손님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 준다. 국을 비롯해 다른 반찬들도 선택이 가능하다. 홍어 무침, 모듬전, 수육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육개장은 말할 것도 없다.
슬픔과 두려움에서 시작한 장례식은 음식이 나오면서 추억과 그리움의 행사로 변한다.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먼 친척분들은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기쁜 재회를 하기도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어둑해지면 왁자지껄하던 장례식장 불이 꺼진다. 남은 식구들이 식사할 차례. 육개장에 밥을 말아 먹었다. 하얀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에 빨간 고추기름이 물들여졌다. 종이국 컵에 담긴 국물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육개장의 또 다른 장점은 여러 번 먹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육개장은 다른 국에 비해 염도가 높은 편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나트륨이 특히 많은 음식으로 짬뽕, 우동, 열무 냉면, 소고기 육개장 등을 꼽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우리와 함께해 온 음식이지만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약간의 소금기를 덜어낸 육개장이라면 좀 더 오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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