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승패를 떠나 다함께 즐기는 아마추어라면 다르겠지만, 돈과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 선수는 자세가 달라야한다. 가능한 이기려 애를 써야한다.
우승이나 강등이 확정됐어도, 결과에 더 이상 반영되지 않는 경기라도 혼신의 힘을 쏟아야한다. 그날의 특별한 '우리 팬'을 생각하면, 져도 괜찮은 경기는 없다.
이런 프로의 기본 자세를 여자배구 정관장 선수들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완전히 승기가 넘어갔다 싶은 단계에서도 포기를 모른다. 부상 생각 않고 몸 던져 공을 받아내고 이동할 힘도 없을 것 같은 다리로 솟구쳐 강한 스파이크를 날린다. 적어도 안방에서는, 홈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들러리가 될 수 없다는 듯 열정을 토해냈다.
정관장은 6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과의 '2024-25 도드람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세트스코어 3-2(25-20 24-26 36-34 22-25 15-12)로 이겼다.
원정(인천)에서 열린 1, 2차전을 정관장이 모두 내줄 때만해도 '한계에 왔구나'라는 느낌이 강했다. 정규리그 3위 정관장은 플레이오프에서 지난 시즌 통합우승에 빛나는 현대건설을 2승1패로 꺾고 챔프전에 올랐다. 그때부터 부상자가 넘쳤고 3경기로도 녹초가 됐다.
그대로 힘든 줄 몰랐고, 13년 만에 다시 밟은 챔피언결정전 무대라 정관장 각오도 남달랐다. 그러나 상대는 '우승 확정하는 날 은퇴'가 예정된 김연경의 흥국생명이었다. 지난 두 시즌 연속 준우승에 그친 목마름을 해소하고 코트를 떠나려는 김연경이나 정신적 지주 김연경의 해피엔딩을 만들어주고 싶은 후배들의 간절함은 정관장 이상이었다.

인천에서의 1, 2차전이 모두 흥국생명 승리로 끝났다. 특히 2차전은 정관장이 세트 스코어 0-2까지 앞서다가 3-2로 뒤집기 패를 당했던 내용이니 맥도 빠졌다. 대전으로 장소를 옮겨 펼쳐진 4일 3차전도 1, 2세트 거푸 흥국생명이 손에 넣었다.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우승까지 단 1세트. 아무리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지만, 이런 상황이면 기울어졌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미 충분히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분위기였다. 정관장은 플레이오프 때부터 진통제와 함께 하는 부상 병동이었다. 그런데 고희진 감독과 정관장 선수들만 포기하지 않았다.
3세트마저 17-19로 끌려가던 정관장은 이후 투혼을 발휘하며 벼랑 끝에서 벗어나더니 기세를 이어 4·5세트를 연속 승리해 리버스 스윕을 일궜다. 2차전과 정반대로, 2세트 먼저 내주고 내리 3세트를 따낸 역전승이었다. 6일 4차전도 드라마였다.
세트스코어 1-1에서 맞이한 3세트를 정관장이 긴 듀스 끝 36-34로 잡고도 4세트를 22-25로 내줬을 때, 이젠 정신이 체력을 지배하지 못하는 듯 했다. 마지막 5세트도 7-10으로 끌려갔으니 정말 어렵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후 믿을 수 없는 5연속 득점이 나왔고 12-10으로 판을 뒤집은 정관장은 결국 대전 팬들 앞에서 상대 축포를 저지했다.
'인도네시아의 김연경'이라는 메가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확실한 마침표를 여러 번 찍은 공이 크지만 다른 모든 선수들이 잘했다. 몸이 성치 않은 베테랑 염혜선이 그리고 표승주가 매 공수 후 동료·후배들과 주문처럼 '집중하자' 외치던 모습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4일과 6일 충무체육관을 찾은 정관장 팬들의 성격이 다 같을 수 없다. 시즌 내내 열과 성을 다하는 열혈 팬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처음 배구장을 찾은 라이트 팬도 분명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을 찾지 못하다 오랜만에 직관을 결정한 가족도 있을 것이다. 늘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인데, 정관장 선수들이 아주 큰 선물을 안겼다는 생각이다.
4차전을 마치고 세터 염혜선은 "이제 드라마 스토리가 바뀌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우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경 우승을 가로막는) 악역이 아닌, 주연이 돼 보겠다"면서 "대전에서 상대팀 우승 축포가 터지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13득점으로 정관장 국내 선수 중 최다 득점을 낸 정호영은 "우승팀을 정해놓고 하는 결승전은 없다. 우리도 13년 만에 챔프전에 올라왔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몸을 갈아 넣으며 뛰고 있다"는 처절한 각오를 밝혔다.

이제 두 팀은 8일 오후 7시부터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최종 5차전을 치른다. 이젠 유불리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서로 모든 것을 던지는 끝장 승부다. 그래도 팬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김연경이 웃으면서 코트를 떠날 수 있느냐다.
김연경은 한국 배구의 자랑이다.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슈퍼스타다. 올림픽 4강 등 팬들에게 많은 것을 선사한 김연경의 마무리가 3연속 준우승이라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많은 팬들이 흥국생명의 우승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고 김연경을 위해 정관장이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정호영의 말처럼 '우승팀을 정해놓고 치르는 결승전'은 없다. 정관장 선수들은 자신들을 응원하고 사랑하는 정관장 팬들을 위해 뛰어야한다. 그들은 프로고 누군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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