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2025년 초 축구계 이슈는 잔디가 지배하고 있다. 프로축구 K리그에서도, 축구대표팀 A매치 후에도 온통 엉망진창 잔디 이야기다.
K리그에서는 잉글랜드에서 날아온 슈퍼스타 린가드가 '상암벌 논두렁 잔디'에 분노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하필 팔로워가 900만명이 넘는 선수가 관련 내용을 SNS에 올렸으니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국가대표 선수들도 나섰다. 최근 고양과 수원에서 펼쳐진 2번의 A매치 후 손흥민은 "홈 성적이 원정보다 나쁜 것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라며 쓴웃음 지었고 이재성도 "홈구장이면 우리에게 이점이 있어야 한다. 계속 잔디만 탓하는 현실이 슬프다"고 호소했다.
축구장 잔디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름이면 타들어 가 여기저기 누런 땅으로 변하고 겨울과 봄의 경계에는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툭하면 흙과 함께 떨어져나간다. 아무래도 자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뾰족한 답을 내기도 어렵다.
사실 '돈'이면 해결될 일이긴 하다. 그 더위에 어떻게 월드컵을 열겠나 싶던 카타르는 경기장에 에어컨을 틀어버렸다. 그러면 된다. 하지만 우린 마음껏 쏟아 부을 수 있는 오일 머니가 없다. 갑자기는 어렵다. 하지만 꾸준히 관심 가지면 바뀔 수 있다.
들여다 볼 수 있던 계기도 있었다. 8년 전 축구대표팀의 주장 기성용의 거센 발언 때 다 같이 신경 썼다면 지금 후배들의 하소연은 없었을지 모른다.

2017년 3월 이야기다. 당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끌던 축구대표팀은 중국 창사에 위치한 허룽 스타디움에서 중국과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6차전을 치렀다. 0-1로 패해 '창사 참사'로 불렸고 슈틸리케 경질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경기다. 결과와 함께 당시 주장 기성용의 발언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원정에 대한 부담이나 환경적 어려움을 걱정하는 질문에 그는 "허룽 스타디움의 잔디가 좋다고 들었다. 어쩌면 상암(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뛰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상암은 잔디가 워낙 안 좋아 가장 뛰기 싫은 곳"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처럼 선수들이 '작심발언' 할 수 있던 풍토도 아니었기에 더 놀라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허한 외침에 그쳤다. 기성용은 2017년부터 2025년 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잔디 문제를 짚었다. 그가 "아무리 말해도 안 바뀐다"고 자포자기할 무렵,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
잔디 문제가 축구계를 넘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화들짝 놀란 서울시설공단이 지난해 11억원에서 3배 늘어난 33억원을 투입해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 보수에 힘쓰겠다고 발표했고 문체부도 한국프로축구연맹과 함께 K리그 경기가 열리는 축구장 총 27곳의 잔디 상태를 전수 조사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야했다. 이제 됐다고 발 뻗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논란이 잠잠해지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 계속 관심 가져달라 조르는 것은 축구계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권과 정부가 지난해 대한축구협회의 '계모임 수준 행정'에 역정 내며 앞으로 축구계를 예의 주시하겠다 했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기성용이 일침을 가했던 그해 5월에는 한국에서 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이 열렸다. 레전드 차범근 전 감독이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함께 뛰었고 이승우와 백승호를 앞세운 신태용호가 16강까지 올라 축구로 뜨거웠던 시기다.
그때 경기들이 인천, 수원, 천안, 대전, 전주, 제주 등 6곳에서 펼쳐졌다. 대회 내내 잔디 문제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세계가 주목하는 대회라 보다 많이 신경 쓴 결과다. 그렇게 하면 된다. 8년 뒤 대표팀의 주장은 잔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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