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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女리더십…'철의 여인' 대처 vs '무티' 메르켈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2014-01-04 02:45 송고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좌측)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AFP=News1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금녀의 벽'을 허물고 자국에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고 이후 3차례나 연임에 성공했으며, 총리로서 영국병과 유럽 재정위기와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리더십은 판이하다. 대처와 메르켈에 늘 따라붙는 '철의 여인'과 '무티(Mutti·엄마)'라는 수식어가 이를 말해준다. 대처가 거침없는 언변에 타협을 불허하는 결단력을 보였던 것에 반해 메르켈은 무척이나 신중하고 소탈하며 안정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독일의 싱크탱크 '오픈 유럽 베를린'의 미하엘 볼게무스 소장은 미 일간지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에 "대처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필요하다면 거리에도 나설 수 있다고 확신했던 이데올로그(이론가)였지만 메르켈 총리는 반대이다. 거리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것에 따라 국정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 '확신의 정치가' 대처 전 총리

대처가 걸어간 길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대처는 1925년 식료품 가게를 하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됐고 이후 연금·국민보험부 정무차관, 교육·과학장관을 거쳐 1975년 에드워드 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로 선출됐다.
1979년에는 총선에서 보수당이 이겨 최초의 여성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세 차례 총선에서 승리해 1990년까지 재임했다. 11년 재임 기간 중에 전후(戰後) 복지 자본주의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복지 축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를 과감하게 밀어붙여 영국병을 치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마가렛 대처의 통치철학은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고 불린다. 현대 글로벌화된 경제의 주요 특징인 통화주의(Monetarism), 민영화, 탈규제, 작은정부, 세금감면 그리고 자유무역은 대처 전 총리가 쇠락해져가던 영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채택했던 정책에서 비롯됐다.

정책 추진에선 강경했다. "나는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이 아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정치인이다(1979년)", "나는 논쟁을 사랑하고 토론을 사랑한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1980년)"와 같은 발언은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80년 10월 보수당 전당대회에선 "숨죽인 채로 그 좋아하는 언론을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유턴(U-turn)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유턴하라.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 확신했다.

비타협은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강성 석탄노조의 파업에 눈 하나 꿈적하지 않은 일은 유명하다. 대처는 석탄산업이 수익을 내지 못하고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 부채가 쌓여만 가는 상황을 두고만 보지 못했다. 이전 정부와 달리 노조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대처는 1984년 3월 20개 탄광을 폐업시키고 2만명을 정리해고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노조는 파업으로 대응했다. 이에 대처는 연간 석탄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석탄을 비축하고 폴란드, 호주 등에서 석탄을 긴급하게 들여오도록 했다. 발전소 가동에 지장이 없도록 석탄과 석유를 병용할 수 있도록 시설도 개선했다.

경찰력을 유기적으로 조직, 파업 현장에 언제나 투입하도록 했다. 경찰과 노조의 충돌은 잦았다. 그 사이 법원은 불법파업이라는 명분으로 탄광노조의 재산을 동결했으며 파업 주동자들에게는 높은 벌금을 부과했다. 노조에선 내부 갈등이 빚어졌고 1985년 3월 노조는 정부에 백기를 들었다.

대처는 당시 석탄노조의 파업에 대해 "우리는 포클랜드(1982년 아르헨티나와 벌인 전쟁)가 없더라도 적과 싸워야 했다. 우리는 언제나 내부의 적을 인지해야 한다. 내부의 적은 싸우기 훨씬 더 어렵고 자유에 더 큰 위험 요인이다"며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대처의 성격이 드러난다. 아르헨티나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 무력점령에 대해 당시 영국사회에선 의견이 양분됐다. 대처는 전쟁의 승패여부에 대해 비관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타국의 무력 침공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명예와 주권을 위해서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양분된다. 타협하지 않는, 때로는 극단적인 정치적 방향성 때문에 평가가 갈린다. 대처의 부고에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지만, 탄광산업의 추락으로 실업자가 속출했던 스코틀랜드에선 대처 장례식날에 축제를 벌였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처는 '철의 여인'이라는 자신의 수식어에 대해 1976년에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내 얼굴은 곱게 화장이 돼 있고 금발 머리는 부드럽게 웨이브져 있습니다. 냉전 전사, 아마존 필리스틴인(교양없는 사람), 중국 공모자. 내가 이중 어느 것에도 속합니까?....그렇습니다. 나는 철의 여인입니다. 우리 삶의 방식에 기본적인 가치와 자유를 지키려는 나를 국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렇습니다"

◇ 소탈한 '엄마 리더십', 메르켈

메르켈 총리의 정치 스타일은 전형적이지 않다. 행동은 느리고 결정은 신중하다. 결단력보다는 주저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보였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위험은 회피하려고 한다. 게다가 정치인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되는 카리스마는 없고 옷차림과 성격은 소탈하다.

메르켈의 전기를 쓴 언론사 기자 앨런 크로프드에 따르면 메르켈은 유럽의 실질적인 리더인 독일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슈퍼마켓에서 직접 쇼핑을 하고 총리가 되기 전에 살던 베를린 중심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메르켈의 노모는 메르켈이 유년시절을 보낸 구동독 브란덴부르크주의 작은 마을 템플린에서 여전히 영어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한 수강생은 선생님이 자신의 딸이 메르켈이라는 사실을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CSM은 보도했다.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하는 데에도 인색하다. 유로존 재정위기가 한창일 때에 메르켈은 그리스 정치인들이나 그리스의 경제 정책을 비난한 적이 없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라며 험담해 독일과 그리스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독일의 일부 언론들은 반(反) 그리스 정서를 알리려고 했지만 메르켈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대신에 유럽연합(EU) 측에 아테네로 가서 조용하게 공무원 휴가 단축, 고가 주택에 대한 세금 인상, 공공 주택 지원 축소 등과 같이 중요하지만 따분한 것들을 요구하도록 했다.

메르켈은 로맨틱한 비전이 담겨 있는 야심찬 연설을 하지도 않는다. 2009년 훔볼트 대학 강연에서 유럽의 미래 비전을 발표하면서 "여러분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나는 장기 목표가 단기 조치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믿는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념에 천착하기보다는 필요하다면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중도 우파 정당에 속해 있으면서도 메르켈은 종종 사회민주당(SPD)의 정책을 종종 채택했다. 2011년 발효된 징병제 폐지 결정과 유세 과정에서 지지를 표명한 최저 임금제 의무화는 좌파 정책에 속한다.

원전 정책에서도 입장을 틀었다. 중도 우파 정부는 독일 원자로 수명을 연장시켜왔지만 2011년에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가동 중단시킬 것이라고 돌연 입장을 바꿨다.

반대파에선 불행한 정책으로 귀결된 수 있는 정치적 편의주의의 전형이라거나 기회주의자적인 태도라고 비난했다. 좌파 정책을 추진해 우파를 배반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당내에서 균열이 발생하기도 했다.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정치인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유로존 재정 위기 수습과정에서 문제 해결에만 매진하고 유럽의 먼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메르켈은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라고 평가절하기도 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하지만 거만하거나 강압적이지 않은 태도는 적을 만들지 않게 했고, 노선 변경은 실용주의의 다른말이다. 유로존 재정위기 때에 지원을 둘러싸고 수차례 보였던 신중함은 독일 유권자들에게 안정감을 줬다. 장엄한 연설은 없지만 꾸밈도 없다.

동독 외무 장관을 지낸 정치인 마르쿠스 멕켈은 CSM에 "무척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약속을 어긴 수많은 예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엄마가 국가를 보살핀다고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 전기를 쓴 작가 니콜라우스 블로메는 "총리는 위험을 감수한다. 하지만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는 않는다. 이것은 대다수 독일인의 삶의 방식이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메르켈의 리더십에 대해 "누구도 메르켈을 '독일제국(Fourth Reich)' 리더라고 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없다"면서도 "이렇다할 감정 표현이 없고 소탈하고 지루해보이는 특징은 독일인들이 원하는 특별한 것이다"고 평가했다.

이어 "독일 동쪽에 있는 국가에서 독일을 상냥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남부 유럽에선 발끈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불평하지는 않는다. 독일 제품을 수입하고 최대 유럽 국가가 여전히 괜찮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고 전망 역시 좋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낀다"며 "메르켈은 아무도 못 느끼게 독일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강국이 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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