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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영화읽기]화이-선과 악, 그리고 권력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2013-10-26 01:12 송고


선(善)과 악(惡)은 언제나 권력(權力)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일찍이 만화가 이현세씨는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만화계를 뒤흔들었던 <남벌>이란 작품에서 이런 대사를 날린 적이 있었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권력에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인간에게 있어서 높이는 모든 것이고, 악이란 선함을 유린하는 일체의 것을. 그리고 행복이란 바로 그러한 권력이 조장되어 간다는 감정이다."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은 분명히 상대적이다. 아니, 그 전에 인간이라면 살면서 끊임없이 하게 되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행위는 사실 별로 의미가 없다.

인간이란 종족 자체가 이미 이 지구에게는 암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인간에 의해 파괴된 대자연을 떠올려보라.
선과 악의 구분이 상대적인 건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행태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한 사람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선하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규정한다. 그것도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결국 인간에게 있어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남벌> 속의 명대사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그게 아니라면 모조리 악으로 치부하곤 만다. 참으로 가볍다.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 이후 딱 10년 만에 야심차게 들고 나온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의 중심에는 주인공 화이(여진구)가 있다.

고등학생인 화이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손에서 자랐고, 그들과 같은 범죄자가 되길 강요받는다. 화이는 지금 기로에 섰다.

화이만 그런 건 아니다. 그를 길러준 다섯 명의 아버지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나뉜다.

큰 아버지인 석태(김윤석)는 화이에게 악을 강요하지만 둘째 아버지인 진성(장현성)은 그렇지 않다. 화이를 유학 보내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 한다.

<스토커>의 박찬욱 감독은 극중에서 사이코패스의 피가 흐르는 열아홉의 여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와 관련해 일찍이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열아홉이란 나이는 선이든 악이든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나이다."

인디아와 비슷한 나이의 화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하지만 <화이>는 선과 악의 '선택'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악은 만들어지는지, 아니면 길러지는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해 선과 악, 권력이 뒤엉켜있는 어지러운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애쓴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권력'이다. 하지만 그 권력은 돈이나 지위처럼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적인 권력보다 범위가 넓다.

애정이 전제되지만 자식에게 있어 부모도 사실은 권력이다. 세상을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언제나 선과 악을 쉽게 구분지어 준다.

그 구분에 따라 아이는 길들여진다. 정말 엄청난 권력이다. 거의 신(神)이다.

그런데 화이는 일반적인 부모들의 가르침과 반대로 배운다. 악을 선으로 배운다.

그 때문에 늘 자신 내면의 양심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소년 화이의 고민은 거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건 비단 화이만의 고민은 아니다. 범죄자들의 손에 길러진 화이는 좀 더 일찍 시작했을 뿐, 그것은 어른이 되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 지점에서부터 <화이>는 이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거대 기업의 총수 진사장(문성근)이다.


생존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에 위치한 진 사장은 사회 전체에 악을 강요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어릴 적에는 부모의 지배를 받지만 어른이 돼서 사회로 나오면 대부분 그의 지배를 받는다.

안타깝게도 그는 권력이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지배자들에게 악을 쉽게 강요하는 존재다. 일반적인 부모와 다른 점이다.

어쨌든 그의 지배 속에서 어른이 된 우리는 화이처럼 끝없이 양심과의 충돌로 괴로워한다.

결국 화이에서 악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지, 아니면 길러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미 화이에게도 악은 계속 존재했다.

그의 내면에 괴물이 살고 있었던 것도 그렇지만 나무를 타고 있는 장수풍뎅이를 아무 이유 없이 손으로 눌러 죽이는 장면은 화이 내면의 악을 잘 보여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설)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설) 간의 대립은 애시 당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원래 이 우주는 빛과 어둠으로 이뤄져 있고, 우주와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속에도 언제나 선과 악은 공존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물체는 다 뒷면을 갖는다. 그런데 그 물체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뒷면은 다 다르다.

거기다 태양빛을 받으면 세상 모든 물체는 그림자까지 갖게 된다. 그 그림자의 방향 역시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바뀐다.

이 세상에 선과 악에 대한 명확한 구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 이유다. 인간도, 세상도 그렇게 뒤죽박죽인 채로 영영 살아간다.

9일 개봉. 러닝타임 126분.


lucas0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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