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법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대한민국에 묻고 싶습니다."
지난 1999년 대구에서 일어난 '황산테러'로 6살 아들을 잃은 박정숙(여)씨. 아들은 떠났지만 그 상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롯이 박씨와 함께하고 있다.
박씨의 아들 김태완군은 학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자 마자 정체모를 누군가에 의해 황산을 맞았다. 이 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태완군은 49일 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범인은 태완군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고 입을 벌리게 한 뒤 황산을 부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았고 공소시효는 불과 2달밖에 남지 않았다.
태안군의 어머니 박씨는 15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코바 살인피해자추모관 설립 발대식 및 살인피해자 유가족 합동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법을 만들 사람에게 직접 묻고 싶다"며 절규했다.
그는 "당시 경찰의 초동 수사 허점이 굉장히 컸다"며 "사건 발생 후 충분히 범인을 밝혀낼 수 있었음에도 (초동 수사 허점으로) 15년이 지난 지금에서 과거의 일을 되짚어 나가다보니 힘든 점이 너무나 많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씨는 "법이라는 제도 아래 나같은 소시민은 막막하게 막혀 있다"며 "태완이의 경우 공소시효까지 2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소시효'를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한국피해자지원협회는 이날 열린 합동기자회견에서 살인 사건으로 일순간 소중한 가족을 품에서 떠나 보낸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필리핀에서 납치돼 살해된 홍석동씨의 어머니 고금례씨는 "하루하루가 미칠 지경"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필리핀에 가 땅 속에 묻혀 있다는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싶다"며 "아들이 정말로 죽었는지, 시신을 봐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씨의 아들 홍씨는 3년 전 필리핀에 여행갔다 납치, 실종됐다. 홍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생사를 찾아 헤매다 결국 지난해 1월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고씨는 "아들도 잃고 남편도 잃었다"며 "꿈에나 그리던 것처럼 납치단 중 한 명이 교도소 동기에게 범행 사실과 아들이 묻힌 장소 등을 털어놨음에도 경찰은 지금까지 '기다리라'고만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 법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한 법"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아들의 시신을 찾아 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난 2011년 5월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서 자신의 차량에 번개탄을 피워 숨진 채 발견된 인천 유나이티드 골키퍼 윤기원씨의 유가족도 참석했다.
당시 경찰은 윤씨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고 결론 냈으나 자살 동기 등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다.
윤씨의 아버지 경록씨는 "인천에서 운동하던 아들이 왜 서울까지 가서 자살을 하겠느냐"며 "아들이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고 절규했다.

제주 올레길 부녀자 살인사건 피해자의 동생인 강모씨 역시 "지금도 꿈같은 이야기고 꿈이라고 믿고 싶은 사건"이라며 "피해자인 유가족은 시체를 인도받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고통 속에 살고 있으나 범인은 삼시 세끼와 주거 등 모든 것을 보장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2012년 용인 50대 부부 피살사건으로 형님을 잃은 유모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수님은 지금도 밤에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경련을 일으킨다"며 "어머니는 사건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형님의 영정사진만을 껴안고 울부짖으셨다"고 전했다.
청주 택시 납치 사건으로 소중한 딸을 한 순간에 잃은 송석표씨는 "딸이 세상을 떠난 3월이 또 왔다"며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대학교 졸업하고 노심초사 끝에 취직한 딸이 일주일 만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며 "범인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며 살인사건에 대한 양형기준 강화를 강조했다.
또 지난 2003년 발생한 축구 꿈나무 최현규(당시 14세)군의 의문사에 대해 아버지 최씨는 "14살짜리 아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겠느냐"며 "아들에게 죄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태어난 죄, 나라는 부모 아래 태어난 죄"라고 격분했다.
끝으로 진주 부녀자 연새살인 사건으로 사랑하던 부인을 잃은 정인환씨는 "범인은 부인을 포함해 5명을 죽인 사람"이라며 "그에게 1심에서 선고된 사형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며 착잡해했다.
그는 "무기징역을 살던 그가 혹시라도 세상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며 "그가 사회에 다시 나온다면 내가 그 순간 그를 해결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살인 사건은 연간 1000여 건으로 하루에 3명 정도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있다"며 "살인 범죄는 피해자와 유가족, 지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심각한 피해를 준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들은 ▲살인범죄의 공소시효 즉각 폐지 ▲살인범죄의 처벌 및 양형기준 양화 ▲살인피해 유가족의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한편 한국피해자지원협회는 이날 살인피해자의 권리보장을 위해 유가족들이 참여하는 국내 최초 '살인피해자 추모관 설립 발대식'을 열었다.
살인 피해 미수자와 살인 피해 유가족이 추모위원으로 직접 운영하는 '한국 살인 피해자 추모관(http://www.kmvm.org)'은 살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영정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국민들 누구나 상시적으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사이트다.
유가족이 관리할 수 없는 피해자를 공동으로 추모하는 형태의 합동관과 유가족이 추모위원으로 직접 참여하는 개인관, 장기미제사건과 타살의혹사건 등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특별관으로 나눠 운영된다.
협회는 또 서울과 경기, 울산 등 전국 17개 지역에 추모위원회를 만들어 살인 사건 발생 당시 고인의 유가족을 지원하는 자원봉사활동과 살인피해자 유가족의 심리치료를 위한 회복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유가족들은 이외에도 ▲한국 살인 피해자의 권리 증진과 유가족의 회복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살인 피해자 유가족의 보호 및 회복에 관한 법률 제정 촉구 등을 목적으로 앞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jung907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