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임해중 기자 =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로 이어지는 상가골목/사진=임해중 기자© News1
</figure>"상권 자체가 죽었는데 리모델링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나요. 차라리 상가를 철거하고 보상비를 받는 게 낫죠."(세운상가 L세라믹 사장)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세운전자상가 골목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긴지 오래다. 70년대 후반 개발계획이 처음 수립됐지만 사업이 수차례 무산되며 낡은 건물만 다닥다닥 붙은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세운상가 가동부터 진양상가까지 걸쳐 있는 상가권을 세운뉴타운에서 분리하기로 확정한 서울시의 결정에 상가주인들과 상인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발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놓고 일방적으로 사업이 백지화되는 일이 반복되는 통에 이에 따른 피해가 고스란히 상인들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운상가 T공업사의 박정준(59)씨는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상가 벽면에 임시방편으로 회칠을 하며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박 씨는 "뉴타운으로 지정된 이후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 가게를 팔고 나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면서 "손님이 없어도 꾹 참아왔는데 이제 와서 사업이 백지화되면 그동안 쌓인 손해는 상인들이 다 떠안아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박씨의 말처럼 세운상가에서는 손님을 맞는 상점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워낙 손님이 없다보니 옆 상점 주인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장기판을 펼친 상인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1층 상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어려워진 일부 상인들이 도청기나 몰래카메라, 도박장비 등의 불법 장비 판매에 나선 이후 세운상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퍼지면서 그나마 오던 손님들 발길도 끊어졌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처럼 세운상가 상권이 고사위기에 처하자 이 지역 상인들은 오락가락하는 서울시의 개발계획이 문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특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분별하게 뉴타운 사업을 추진한 결과 세운상가의 슬럼화가 더 가속화됐다는 쓴 소리가 쏟아졌다.
오 전 시장은 취임 이후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이어지는 상가 8개동을 헐고 세운뉴타운과 묶어 대형 녹지를 조성하는 '세운녹지축' 개발계획을 추진했다. 2009년 현대상가를 헐고 940㎡ 규모의 '도시농장'을 조성하는 1단계 사업이 완료됐지만 이듬해 문화재청이 세계문화유적인 종묘의 경관 보호를 이유로 122m인 건물 높이를 75m로 낮추라고 요구하며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층수가 낮아져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진데다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세운상가 개발사업은 추진동력을 잃고 수년째 사업이 '올스톱'됐다. 이 과정에서 상가 이탈 가속화와 점포시세 하락이 겹치면서 세운상가 상권이 급속히 쇠락했다.
실제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세운상가 점포의 시세는 2009년 이전 3.3㎡당 6300만∼6500만원 사이를 오갔지만 현재는 4000만원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박 씨는 "개발이 5년 이상 지연되며 점포 시세가 40%가까이 떨어졌다"면서 "뉴타운계획에 많은 상인들과 주민들이 반대했지만 서울시가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상인들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토로했다.
세운뉴타운과 세운, 진양 상가를 분리·개발하더라도 상권 활성화는 힘들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보존형 리모델링으로 오래된 상가 건물을 고치고 상인과 전문가, 서울시가 공동으로 협의체를 구성해 상권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다는 게 서울시의 계획인데 상가를 싹 철거하고 새로운 상권을 육성하지 않는 이상 쇠락한 세운상가를 다시 살리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20년 동안 세라믹 상점을 운영해온 김길훈(61세)씨는 "용산전자상가에 손님도 다 뺏겼고 점포 가격도 떨어졌는데 건물에 시멘트를 덧칠 한다고 상권이 살아나지는 않는다"면서 "리모델링이 아닌 재개발로 사업이 추진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푸념했다.
현대상가를 철거할 때 재개발 보상금 명목으로 각 점포당 많게는 2억원까지 지급됐는데 현재 세운상가의 점포 시세가(10㎡ 기준) 1억2000만∼1억40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재개발을 통해 보상금을 받고 상가를 정리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김 씨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 가게 문을 열어 두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역사문화를 보전한다는 취지도 좋지만 이런 상인들의 상황을 감안해 서울시가 재개발이나 다른 대안을 빨리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haezung2212@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