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주 자신의 미국 방문 기간 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과 관련해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사의(辭意)를 밝혔음에도 이를 아직 수리하지 않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14일 청와대에 따르면, 방미(訪美) 기간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 수석은 지난 10일 밤 귀국 직후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현재까지 "이 수석의 사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허 실장은 앞서 12일 이번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홍보수석은 귀국 당일 내게 소속 직원의 불미한 일로 모든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바 있다"면서 이 수석의 사의 표명 사실을 처음 외부에 알렸다.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대통령 비서실) 직제상 홍보기획비서관, 국정홍보비서관, 춘추관장과 함께 홍보수석실 산하 비서관급 직책으로 홍보수석의 지휘·감독을 받는 자리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윤 전 대변인 개인의 일탈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직 제기된 의혹의 진위 여부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이 수석이 일단 '하급자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을 지고 허 실장에게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 수석은 앞서 10일 밤 직접 윤 전 대변인 관련 사과문을 발표했을 때에도 "홍보수석으로서 내 소속실 사람이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대단히 실망스럽고 죄송스럽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과문 발표 당시 이 수석은 자신의 사의 표명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었다.
이에 대해 다른 여권 관계자는 "임명권자(박 대통령)의 판단을 모르는 상황에서 비서가 먼저 '그만 두겠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면서 "그래서 이 수석이 먼저 허 실장에게 사의를 표시한 다음에 박 대통령의 의중을 살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선 이 수석의 사의 표명 시점이 허 실장이 밝힌 귀국 직후(10일 오후)가 아니라, 실제론 그보다 훨씬 더 뒤였을 수도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만일 허 실장의 설명대로 귀국 직후 이 수석이 사의를 표명한 상태였다면 '나 이제 그만 둘래'라고 한 사람이 청와대의 공식 입장을 담은 사과문을 10일 밤 발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허 실장의 대국민사과 당일에도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된 사과문 '초안'엔 이 수석의 사의 표명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현장에서 구두(口頭)로만 이 수석의 사의 표명을 알렸던 것이다.
허 실장의 사과문 발표 당시 이 수석은 본인이 워싱턴 현지에서 이번 사건을 처음 인지한 지 하루 이상이 지난 뒤에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데 따른 '늑장 보고' 논란과 함께 본인 명의로 윤 전 대변인 사건과 관련한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한데 따른 '셀프 사과' 논란 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
아울러 윤 전 대변인이 지난 8일(현지시간) 주미(駐美) 대사관 소속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신고가 현지 경찰에 접수된 이후 박 대통령의 방미 마지막 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LA)에 동행하지 않은 채 '나 홀로' 귀국한 경위에 대해 이 수석은 "윤 전 대변인 본인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윤 전 대변인은 11일 회견을 통해 "이 수석의 귀국 종용이 있었다"고 반박하고 나서면서 지금도 양측의 진실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청와대 주변에서조차 "이 수석의 사의 표명이 실제론 허 실장의 대국민사과 직전에 이뤄졌을 것"이란 관측에서부터 "홍보라인 관계자들이 이미 결정된 사과문 내용 중 이 수석의 사의 표명 부분을 임의로 뺐던 게 아니냐", "이 수석의 사의 표명이 없었는데도 허 실장이 '사의 표명을 했다'고 발표했던 게 아니냐"는 등의 얘기가 나돌고 있다.
물론 청와대 측은 이 같은 관측을 일체 부인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1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인사말에서 윤 전 대변인 사건 관련 피해자 등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한 뒤 "관련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이 수석의 이날 회의 불참 사실과 맞물려 "그의 사표(辭表)가 사실상 수리된 것"이란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4일 "아직 인사권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 말로 이 수석의 사표가 아직 수리되지 않은 상태임을 밝혔다.
이 수석은 전날 오전 출근해 수석실 회의를 주재한 뒤 청와대를 떠났으며, 이날은 출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이 수석의 사표 수리 여부 결정이 지연됨에 따라,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 수석이 윤 전 대변인 사건 관련 대처에 있어 다소 미숙한 점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혼자서 너무 많은 욕을 먹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이젠 그만 좀 하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청와대 내부에선 이번 사건 발생 후 초기 대응 과정에 개입한 인사들의 범위를 '최소화'하려는 듯한 기류도 감지되고 있다.
이 수석의 경우 이번 윤 전 대변인 사건 발생 이후 현지 대응 과정에서 홍보수석실 소속 전광삼 선임 행정관이 요소요소에 관여했었다고 밝히면서도 다른 관계자들의 이름은 일체 거론하지 않았었다.
그는 앞서 윤 전 대변인의 단독 귀국 배경 등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윤 전 대변인에게) 자세한 얘기는 전 행정관과 상의하라고 했다"고 답하는가 하면 아예 답변 자체를 전 행정관에게 떠넘기기까지 했다.
이 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대로라면, 현지 한국문화원 관계자로부터 윤 전 대변인의 '성추행'설(說)을 처음 접한 것도, 이 수석에게 이 같은 상황을 처음 보고한 것도, 또 사건 이후 윤 전 대변인과 처음 연락을 취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도 모두 전 행정관이다.
결과적으로 윤 전 대변인을 제외하고 이번 사건에 대한 초기 대응 및 논의 과정에서 실명이 등장하는 청와대 측 인물은 이 수석과 전 행정관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외교라인 관계자들은 "워싱턴 방문 일정을 마치고 대통령 전용기편으로 LA로 향발한 이후에야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선 "청와대가 문책 범위를 축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련 인사들의 범위를 한정시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청와대 홍보라인에선 민정수석실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방미 활동 전반에 대한 내부 감찰에 나서자, "현지에서 고생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 당시 윤 전 대변인 사건과 관련,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관련 수석들도 모두 책임져야 한다"며 공직 기강 확립을 강조했었다.
이에 대해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공식 회의석상에서 말할 땐 한 글자, 한 글자 가려서 하는 사람"이라며 "박 대통령이 굳이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추후 여론 추이에 따라 이 수석의 사의 표명이 반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낳은 파장을 감안,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모양새가 돼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청와대에서 여전히 많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LA에서 관련 보고를 받은 뒤 이번 성추행 의혹 사건의 당사자인 윤 전 대변인을 '대통령 비서실 대변인'직에서 경질하긴 했지만, 이후 면직에 필요한 법적 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윤 전 대변인은 아직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ys417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