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와도 끄떡없죠"…전통 장 담그는 제주 토종 푸른콩 지킴이
[맛있는 향토일] '푸른콩 된장 장인' 박영희 푸른콩방주 대표
2대째 이어 온 장인 정신…"신념 꺾지 않고 살아남는 게 꿈"
- 오미란 기자
(서귀포=뉴스1) 오미란 기자 = '제주 푸른콩 된장 장인' 박영희 푸른콩방주 영농조합법인 대표(55)가 제주살이를 시작한 건 34세 때였던 지난 2003년부터다. 가업을 이어받자는 남편 제안에 서울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두 아이와 함께 먼저 제주로 향했다는 그다. 박 대표는 "그땐 마냥 '이대로 가업이 없어지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제주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것도 나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삶을 180도 바꾼 그 '가업'이란 건 다름 아닌 그의 시어머니 양정옥 씨(87·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5호)의 일이었다.
과거 돼지고기 음식점을 운영하던 양 씨는 당시 곁들여 내던 전통 장국이 인기를 끌자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장을 담가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그 장이 바로 '제주 푸른콩 된장'이다.
완전히 여물어도 초록빛을 띠는 제주 토종 '푸른콩'은 향긋하고 달짝지근해 주로 장을 담글 때 쓰여 '장콩'이라고 불릴 정도로 흔한 콩이었지만, 지금은 재배 농가가 적어 보기조차 힘들다. 양 씨는 그 푸른콩을 직접 재배하며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가온 유일무이한 이였다.
박 대표는 그런 시어머니 손맛을 배우는 데만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시어머니뿐 아니라 시어머니와 동년배인 동네 어르신들을 선생님으로 모시며 씨 뿌리는 법부터 날씨 보는 법, 맛 내는 법까지 꼼꼼히 배운 시간이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힘도 세고 기억력도 좋다고 많이 예뻐해 줘 그런지 제주 농촌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박 대표가 운영하는 푸른콩방주 영농조합법인은 하지(양력 6월 21일경) 전에 푸른콩 종자를 파종하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전에 자라난 콩을 거둔다.
농사는 제주의 여러 농가와 나눠 짓는다. 한 곳에만 지었다가 태풍에 전부 폐작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실제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매미'가 연달아 몰아쳐 피해가 발생하자 박 대표네는 1년 치 장을 줄이면서 씨앗을 이웃에 나눠줬다고 한다. 지금 자라는 푸른콩 대부분이 그 후손이다.
푸른콩방주 영농조합법인 한편엔 채종포(씨앗을 받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밭)도 설치돼 있다. 다른 종자와 교잡되지 않도록 사업 초기부터 채종포를 직접 설치해 토종 푸른콩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겨울에 되면 음력 설까진 콩을 삶아 만든 메주로 장을 담근다. 시기에 따라 메주로만 장을 담그기도 하고, 메주로 담은 장에 누룩을 같이 쓰기도 하며, 메주 없이 그냥 삶은 콩에 누룩을 넣어 장을 담기도 하는 다양한 제주 전통 제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정성스레 만든 메주는 돌담에 화산송이(화산석 부스러기)를 바른 발효실에서 맛있는 장이 될 채비를 한다. 시간이 흐르면 향 좋고 부드러운, 은은한 단맛의 제주 푸른콩 된장이 완성된다.
박 대표네는 2011년 '제주도 명품 장수 기업' 지정을 시작으로 2013년 국제 슬로푸드 협회 '맛의 방주' 국내 1호 등재,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 백년소공인 지정 등으로 이름을 알려 왔다. 2019년엔 박 대표 본인이 제주도로부터 '제주 푸른콩 된장 장인'으로 지정받았다.
오늘이 오기까지 여정은 쉽지 않았다. 박 대표 시어머니가 장을 담그던 때와 비교하면 온통 변수투성이여서다. 태풍·가뭄·집중호우 등 기상 이변부터 대기업 위주로 변한 식품산업 구조, 밥을 잘 먹지 않는 소비자들 입맛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박 대표는 "좁은 길로만 가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여러 길을 넓게 가 보려고 했다"며 "아직 사업적으로 안정된 상태는 아니지만 분말 된장, 건조식품, 더치 커피 등을 개발해 일부 판매하고 있고, 조미료나 분말 청국장 개발 작업도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앞으로의 꿈은 신념을 꺾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그동안 나름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그 성과란 게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의 성과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좁은 해협을 지나는 듯한 기분"이라며 "이쪽저쪽 부딪히면서 다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도와 제주관광공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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