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임산부석 시행 2년째…임산부에겐 여전히 '그림의 떡'

임산부들 "희망고문…힘들지만 양보 말도 못 꺼내"
"노약자석 앉았다가 욕설·폭행 봉변 당하기도"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김다혜 기자 | 2017-10-16 06:05 송고 | 2017-10-18 09:50 최종수정
(자료사진) © News1 임준현 인턴기자
(자료사진) © News1 임준현 인턴기자


완연한 가을날씨를 보인 15일 주말 오후, 홍대입구역에서 시청역 방향으로 순환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은 나들이객들로 북적였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인 가운데 핑크색으로 도배된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임산부석 2칸에는 모두 임산부가 아닌 중년의 여성과 남성 등이 앉아 있었다. 

좌석 끝에 마련된 임산부석에 앉아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에 떼지 못하던 한 50대 여성은 "이곳이 임산부석인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 "임산부든, 노인이든 오면 일어서려고 했다"며 "그럼 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또 다른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60대 남성은 엉거주춤 앉아 있다 한 여성이 다가오니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옆 칸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한 60대 여성 역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임산부석인 것을 아느냐'라는 질문을 건네자 대답 없이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상황은 다른 노선의 전동차 역시 비슷했다. 1호선 전동차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한 60대 남성은 양쪽 귀에 이어폰은 꽂은 채 스마트폰을 하다 취재진이 말을 걸자 손사래를 치며 입을 걸어 잠갔다. 
이날 취재진이 확인한 총 19개의 임산부석 중 비어 있는 곳은 단 3곳뿐. 주인이 있던 16석에 앉은 이들은 임산부가 아닌 중년의 남성과 여성, 어린 아이들, 20~30대 여성과 남성, 노인 등이었다. 

임산부를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핑크색의 '임산부석'이 만들어진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처럼 여전히 임산부들은 눈칫밥을 먹으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3년부터 수도권 지하철 차량 1대당 2석씩 총 7100개의 임산부석을 마련했다. 그러나 '배려' 문화가 정착되지 않자 서울시는 2년 전부터 임산부석을 분홍색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임산부석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임산부들에게 임산부석은 '그림의 떡'이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달 여의도 불꽃축제가 있던 날 지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이용했다는 임신 26주의 A씨는 "불꽃축제 때문인지 지하철 5호선에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며 "내가 탄 전동차의 임산부석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의 배와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이 지하철에 탑승한 초등학생 조카가 "이모, 저 자리에 임산부인 이모가 앉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하길래 내가 다 민망했다"고 털어놨다. 

임신 10주차인 또 다른 여성도 "며칠 전 지하철에 타니 임산부석에 남성 2명이 앉아 있더라"며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서 비켜달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산부임을 알리기 위한 핑크색 '임산부 배지'도 착용하고 있었다는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임산부의 출퇴근은 너무나 힘들다"며 "왜 지하철 임산부석에 임산부가 마음 편히 앉을 수 없는 것인지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임신 9개월 만삭의 임산부 B씨는 "얼마전 금요일, 퇴근시간이 겹치면서 지하철에 승객이 정말 많았다"며 "임산부석에 여성과 남성이 앉아 있었는데, 만삭인 배를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비켜달라고 해야 할까' 백번을 고민했다는 그는 "결국 해코지라도 당할까 무서워 다른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며 "임신한 것이 죄도 아닌데, 죄 지은 기분이 든다"고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밖에도 임신을 경험했거나 현재 임신 중인 여성 대부분은 임산부석에 임산부가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임산부석에 직접 앉아 본 적이 없다는 등의 경험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임산부의 날을 맞아 80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임신부의 59.1%만이 '배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즉, 임산부 10명 중 4명은 임산부석 양보 등을 비롯한 배려를 한 차례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자료사진) © News1 구윤성 기자
(자료사진) © News1 구윤성 기자

이보다 더한 문제는 임산부석에 앉을 수 없어 노약자석 등에 앉았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는 것이다. 임신 31주차라고 밝힌 한 여성은 최근 1호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연달아 욕설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한 중년 남성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젊은 것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말하며 욕을 하더라"며 "이후 바로 다음역에서 탑승한 또 다른 남성 역시 '젊은 것들은 다 일어나라'고 소리를 치며 욕설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임산부 배지도 차고, 임산부라고도 밝혔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정말 분하고 화가 나더라"고 했다. 

이밖에도 지난해 8월에는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임신 27주 임산부가 노인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인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임산부에게 수차례 자리 양보를 요구했고, 여성이 임산부임을 밝히자 이를 확인해야 한다며 임부복을 걷어올리고 여성의 복부를 가격했다. 

이에 임산부들은 "이럴거면 임산부석을 대체 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한 임산부는 "임산부석으로 희망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눈치게임 하는 것도 아닌데 정말 속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밖에도 아예 눈치가 보여 임산부석 인근으로는 가지도 않는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처럼 양보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지 않자 서울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 측이 '자리 비워두기' 캠페인을 진행 중이지만 이 또한 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이들 대부분은 "비워두기 캠페인은 못 들어봤다"며 "임산부가 오면 비워주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민들은 우선 '임산부석은 비워둬야 한다'는 인식이 정착되고 구성원간의 배려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다는 직장인 박모씨(27·여)는 "임산부들이 앉고 싶어도 앉을 수 없을까봐 임산부석에는 앉지 않는다"며 "'임산부인데 자리 좀 비켜달라'고 주문하기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임산부석은 아예 비워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다"고 인식 강화를 주문했다. 

또 다른 시민 이모씨(29)도 "가끔 중년 남성이나 할아버지 등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임산부석 이상의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다른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시민들이 좀 더 큰 아량과 배려심을 갖도록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jung9079@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