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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정부 4년] 원칙도 신뢰도 잃은 불통의 리더십

(서울=뉴스1) 유기림 기자 | 2017-03-17 09:00 송고 | 2017-03-17 10:37 최종수정
© News1 장수영 기자
© News1 장수영 기자

임기 4년 내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라다녔던 꼬리표는 '불통'이었다. 이는 결국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된 계기가 됐다.

특유의 폐쇄적 소통 방식이 발단된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태는 박 전 대통령이 내세운 신뢰에 치명타를 줬다. 각종 정책과 관련해 원칙으로 포장했던 강경 드라이브는 민심이 떠나는 이유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18년간의 은둔 생활 영향으로 소수 측근들에만 의지했다. 일각에선 양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암살과 이후 고립된 상황 탓에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이 박 전 대통령에게 힘든 일이 됐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 성향이 통치 방식까지 이어져 국가적 불행이 됐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아래 굳게 닫혔고, 급기야 지난해 9월엔 수십년간 음지에 있었던 '비선 실세' 최씨 존재가 드러났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만 박근혜 정부 인사는 '코드·회전문·비선 인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3년 취임 초 당시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은 잇따른 고위직 인사 참사에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그럼에도 인사 잡음은 멈추지 않았다.
가까운 예로, 박 전 대통령은 국회로부터 탄핵되기 한 달여 전인 지난해 11월 정국 수습 차원에서 김병준 국무총리·임종룡 경제부총리·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후보를 발표했지만 일방적 인사 추진에 또다시 지적받았다. 결국 박승주 후보는 자진 사퇴했고 내정 자체가 없던 일이 됐다.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2015년 신년 기자회견)라고 할 정도로 대면 보고를 선호하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은 끝내 검찰 조사와 특별검사팀의 대면조사, 헌법재판소 출석마저 피했다. 헌재가 탄핵 선고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다. 불통이 박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탄핵안 가결 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세 번의 대국민 담화로 의혹을 일방적으로 부인하기만 했다. 지난 11월29일 3차 담화에선 일부 기자의 돌발 질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경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다"고만 하고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본관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직무 정지 중이었던 지난 1월1일엔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들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파면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자회견은 이뤄지지 않았다. 단지 지난 1월25일 보수 성향 인터넷 방송인 '정규재TV'와 인터뷰를 가진 게 전부였다.

이 자리에선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촛불 시위의 2배도 넘는 정도로 열성을 갖고 많은 분들이 참여하신다고 듣고 있다"고 지지층만을 겨냥한 말을 남겼다. 이것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국내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라는 점은 바라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비어 있는 7시간 행적이 논란에 휩싸인 것도 불통이 자초한 꼴이다. 대형 재난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 책임도 컸지만 박 전 대통령이 당시 보고와 지시 상황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기에 국민적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월10일 헌법재판소에 문제의 7시간 행적을 담은 답변서를 제출했지만 허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공을 넘겨받은 검찰이 3년 동안 이어온 의문을 해소할지 시선이 쏠린다.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도 불통의 연속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51.6%라는 득표율을 얻어 취임한 박 전 대통령은 주요 정책을 추진할 때 반대 진영을 설득하기보다 고집스럽게 제 갈 길을 갔다. 국정 농단 사태 속에서 불거진 소위 문화계 '블랙·화이트 리스트' 혐의는 자신을 지지한 절반의 국민만 바라본 극단적 결과인 셈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동남권 신공항,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합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누리과정 예산 편성 문제, 개성공단 폐쇄 등도 대표적 사례다. 박 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경제 활성화 및 노동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주로 권력이 없는 국민들이 참여하는 서명운동에 직접 나선 장면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두 번 행사한 일도 마찬가지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당시 모법을 위반한 정부 시행령에 국회가 수정 변경 요청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면서 '배신의 정치 심판' 발언을 했다. 특정 정치인을 찍어내기 한다는 비판이 일었으며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한 이 말은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 사태까지 이어졌고, 박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g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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