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탄핵인용]박정희에서 시작해 최순실로 파면…박근혜 19년 정치인생

콘크리트 지지율 30%에서 국정농단 사태로 4%까지 추락

(서울=뉴스1) 유기림 기자 | 2017-03-10 16:00 송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3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2013.2.25/뉴스1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3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2013.2.25/뉴스1

'박정희'로 시작해 '최순실'로 끝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19년 정치 인생이 10일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그것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대통령이란 불명예와 함께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을 거쳐 제5~9대 대통령을 지낸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애(令愛)로 청와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 청와대로 이사했을 때 박 전 대통령 나이는 불과 12세였다.
22세 때인 1974년 모친인 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권력과 정치 의지를 다지게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 활동을 하며 최태민·순실씨 일가와 인연을 맺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흉탄에 살해된 뒤 박 전 대통령은 동생들과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18년간 칩거 생활을 하며 육영재단, 영남대 재단, 육영수 여사 기념 사업회,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부친의 명예 회복을 꾀한 셈이다.

산업화 세대에 '박정희 향수'가 남아 있는 만큼 박 전 대통령은 보수 진영의 러브콜 대상이었다. 그는 1997년 지원 요청을 받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당시 이회창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 됐다.
이듬해인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년 동안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거치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이끌었다. 이후 제16·17·18대 대구 달성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됐다.

2002년엔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 한나라당을 나와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11월 재입당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란 별칭을 얻게 된 건 2004년이었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을 맞았을 때 대표로 추대돼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천막 당사' 이전을 결정하며 전체 299석 중 개헌 저지선인 121석을 확보했다.

또 한 번 '동물적 정치 감각'을 드러낸 것은 2006년 5·31 지방선거 때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지원 유세 도중 서울 신촌에서 커터칼 피습을 당하고 수술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확인했단 전언이 퍼지면서 선거 판세를 뒤집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재수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처음 도전했으나 이명박 후보와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고배를 마셨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친이(親이명박)·친박(親박근혜)으로 계파가 갈리게 됐다.

2008년 총선 국면에선 계파 갈등 속에서 낙천된 박 전 대통령 측근들이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정당 사상 유례 없이 개인의 이름을 빌린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을 간접 지원한 데 이어 한나라당 복당을 요구해 실현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위기에 바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나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쇄신책을 써 그해 4·11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했다. 명실상부한 당 내 1인자가 된 것이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비례대표로 당선됐으나 11월 대선 출마를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12월 제18대 대선에서 '원칙과 신뢰'를 내세워 득표율 51.6%로 48.0%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3년 2월25일 취임식을 갖고 34년 만에 화려하게 청와대에 복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절반의 민심을 얻은 상태에서 취임 내내 불통 행보를 이어갔다. 취임 첫해 인사 참사가 거듭됐고, 임기 내내 야당은 물론 여당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반대 여론을 고려하지 않고 국정 역사교과서, 개성공단 폐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밀어붙여 불통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거나 않는 모습은 지지율 하락의 계기가 됐다.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유지하던 박 대통령이었으나 최순실씨 국정 농단 의혹이 증폭되면서 지지층마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헌법이란 '원칙'에서 벗어났고 국민과의 '신뢰'를 저버린 대가였다. 지지율은 4%까지 떨어졌다.  

결국 지난해 12월9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그것도 찬성 의원 234명이라는 압도적 표차였다.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검찰과 특검 조사에 임하지 않으면서도 두 차례 장외 여론전으로 반전을 꾀했던 박 전 대통령은 결국 헌재 심판으로 정치 인생에 불명예 종지부를 찍게됐다.

박 전 대통령은 국내 최초 '여성·부녀·미혼·공대 출신' 대통령이란 진기록을 갖고 있었다. 이젠 이 모든 걸 덮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 우리 국민들은 모두 최초 '탄핵 대통령'이란 역사적 비극의 목격자가 됐다.


girin@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