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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윤주기자 그란폰도 출전기③]태풍 비켜간 지리산 161㎞ 달리기

성삼재·정령치·오도재 악명 높은 고개 넘어 획득고도 3400m
구름에 잠긴 지리산 절경에 극한의 고통도 잊는다

(남원=뉴스1) 차윤주 기자 | 2016-10-05 08:00 송고 | 2016-10-05 09:07 최종수정
차윤주 기자.© News1
차윤주 기자.© News1

모든 걸 태워버릴 듯했던 여름이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어느덧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10월. 그 두번째날, 지리산의 주인은 구름과 안개였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자덕' 동호인들이 지리산 굽이굽이를 오르겠다고 전의를 불태웠지만, 그 산은 쉬이 속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지리산을 사랑하게 됐는지 모른다.

지난 2일 전북 남원시 등이 주최한 '제1회 지리산 그란폰도'는 지금까지 열렸던 수많은 자전거 동호인 대회 중 가장 힘들고 아름다웠던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열렸지만 첫 대회답지 않게 매끄럽고 세심한 진행으로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됐고, 참가자들은 드물게 아름다운 지리산의 풍경을 선물처럼 받아들었다. 
◇성삼재·오도재 등 넘어 국내 최고 난도 대회
지리산 그란폰도가 예고된 건 올해 여름. 그란폰도(Granfond)는 '위대한 인내, 기나긴 여정'을 뜻하는 이탈리아말로 극한 코스를 제한시간(10시간)에 완주하는 비경쟁 대회다.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에서 그란폰도가 열린다는 소식은 자덕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나 역시 기필코 참가를 다짐했다.
백두대간 그란폰도 코스 161㎞ 지도© News1
백두대간 그란폰도 코스 161㎞ 지도© News1
백두대간 그란폰도 코스 고도표© News1
백두대간 그란폰도 코스 고도표© News1

흔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3대 그란폰도로 백두대간(10월), 설악(5월), 무주(6월) 대회를 꼽는다. 이 중 가장 사악하다는 설악 그란폰도는 구룡령·한계령·조침령 등을 넘어 거리 208㎞, 상승고도 3700m를 자랑한다. 지리산 그란폰도는 설악 보다 길지 않은 161㎞지만, 상승고도는 3400m로 비슷하다. 짧은 거리에 더 많은 산악구간을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고산터널(해발 522m)을 시작으로 성삼재(1079m), 정령치(1172m), 오도재(746m), 필령(491m) 등을 차례로 넘게 되는데 모두 어렵기로 소문난 고개들이다. 이중 성삼재와 오도재는 단연 엄청난 경사도를 자랑한다. 지리산 그란폰도가 첫 개최와 동시에 설악 그란폰도와 나란히 동호인 최고 난도의 대회로 유명해진 이유다. 

◇악천후 예보에 출전포기 속출
대회를 사나흘 앞두고 태풍 '차바'가 북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날부터 대회날까지 많은 비가 쏟아질 것이란 예보였다. 지리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만큼 다운힐이 어려운 곳이다. 비와 거친 바람 속에 급한 헤어핀(심하게 꺾인 도로)을 따라 산을 내려오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하다.
대회 연기·취소 요청이 쇄도했다. 주최측이 대회를 이틀 앞두고 강행을 결정하자 출전 포기 선언이 이어졌다. 같이 가기로 한 8명 중 여섯이 고심 끝에 출전을 포기했다. 마지막에 한명이 마음을 바꿔 전날 늦은 저녁 같이 남원으로 향했다.

대회 시작 시간(6시)에도 비가 내리면 지리산 흑돼지나 먹고 상경하자고 큰 소리를 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남원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굵어진다. 야속한 비에 심란하기 짝이 없다. 자정쯤 도착해 짐을 풀고, 빗소리를 들으며 싱숭생숭 잠을 청했다. 

새벽4시 눈을 뜨자마자 밖을 내다본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땅은 마르지 않았지만 일단 비는 내리지 않는다. 정말 그친걸까, 일단 타고보자, 많이 내리면 중간에 포기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침을 챙겨먹었다.

그럼에도 10분 거리 대회장으로 향하는 마음이 복잡하다. 잠들기 전엔 시작때 만이라도 비가 안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땅이 젖어 있으니 걱정이다. 구름이 두꺼워 날이 완전히 갠 것 같지도 않다.

그냥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안전하게만 타자고 다짐한다. 자전거는 "오래 안 다치고 타는 게 제일"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막상 안장 위에 오르면 욕심이 생긴다. 더 빨리 멀리 달리고 싶어진다. 내 힘으로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오늘은 그말을 진심을 다해 몇번이나 되뇌인다.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다 죽거나 불구가 되고 싶진 않다. 조심히 천천히 내려오자. 그만큼 지리산은 위험한 곳이다.
대회 시작을 앞둔 지난 2일 새벽 남원공설운동장의 전경© News1
대회 시작을 앞둔 지난 2일 새벽 남원공설운동장의 전경© News1

대회장에 도착한 시각은 6시. 비가 내렸지만 남쪽지방이라 그런지 기온이 차지 않다. 남원공설운동장에는 벌써 긴장된 표정으로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다. 우리 모두 이날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엘리트 체육인이 아닌 동호인들이 이런 극한 대회를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생업전선에서 돌아와 시간을 쪼개 훈련을 하고, 취미와 다른 많은 것들을 병행하며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나는 주말엔 하루 정도 서울 근교로 100㎞ 안팎을, 주중 하루는 꼭 북악산을 되는대로 올랐다. 대회 일주일 전부턴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강도를 높였다. 갑자기 일이 쏟아져서 목표에 못 미쳤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모르는 이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취미이고 대회일테지만, 같은 고난을 헤쳐왔을 선수들을 보며 잠시 동지애에 마음이 짠하다. 우린 그저 평범한 생활인이지만 오늘은 모두가 선수다. 달려보자 지리산! 
 
6시30분쯤. 카운트다운과 함께 레이스가 시작됐다. 이른 새벽 경찰의 차량통제와 주민들의 인사에 특별한 긴장감과 흥분으로 마음이 들썩인다.

'제1회 지리산 그란폰도' 대회포스터 이미지© News1
'제1회 지리산 그란폰도' 대회포스터 이미지© News1

◇성삼재 가는 길, 낯선 이들에게 생명수를 얻다
몸을 풀며 한시간쯤 달렸을까. 첫번째 업힐 고산터널(6.5㎞, 평균고도 6.3%)이 시작된다. 지리산은 동네산이 아니다. 힘들다는 기분이 들면 금세 속도계에 찍힌 경사도가 10%가 넘는다. 아직 가시지 않은 비구름이 흩뿌린 안개와 수중기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글에 김이 서려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 속으로 사라지는 라이더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힘들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모두 자기 속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 신나는 내리막을 하면 해발고도 1079m 성삼재(9.6㎞, 9.1%)가 바로 이어진다.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문제가 생겼다. 생각 보다 날이 더워서 준비한 물을 초반에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한시간은 가야 1차 보급소(54㎞ 지점 노고단 시암재)가 나오는데 성산재 초입에 물이 100㎖나 남았을까. 되는대로 오르는 수밖에 없지만 목마름과 탈진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결국 절반도 못 가 물이 떨어졌다. 내려서 물을 좀 빌려볼까 어쩔까 고민하며 페달을 굴리는데 누가 말을 건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묻는데 반갑게도 자전거에 물통이 두개 달려있다. 코스를 대강 알려준 뒤 물 한모금을 청했다. 계속 발을 구르며 낯선이들끼리 생명수를 주고받는다. 양껏 마시라는 말이 정말로 고맙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목이 탄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 때문이다.
 
보급소까지 2~3㎞ 남은 지점에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팀 차'가 한대 서있다. 모르겠다. 내려서 물동냥을 했다. 운 좋게도 아이스박스에 담긴 물을 나눠준다. 같은 사정인 사람들이 또 있었나 보다. 쫓아오던 다른 선수 몇몇도 물을 나눠받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하고 다시 안장에 올라 힘을 냈다. 
 
그렇게 도착한 시암재 보급소에서 주최측이 나눠준 바나나와 음료수, 양갱과 초코우유 등을 마구 먹었다.   
 
◇내 발을 굴려 맛보는 지리산의 절경
성삼재 정상까지는 이제 2㎞만 가면 된다. 연료를 채우고 쉬었더니 조금씩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백명의 라이더들이 지리산 굽이굽이를 헤매며 구름과 안개 속을 달리고 있다. 산의 능선을 더듬으며 오로지 내 다리와 심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고통, 터질듯한 심박이 전해져 온다.
힘겹게 오른 성삼재 정상, 구름이 짙게 드리운 지리산의 풍경© News1
힘겹게 오른 성삼재 정상, 구름이 짙게 드리운 지리산의 풍경© News1

산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지리산은 다른 얌전함과 포근함이 있다. 그리고 힘들게 오른 성삼재 정상, 그 아름다운 능선에 짙은 구름이 걸려있다.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 이런거구나, 거대한 목화이불을 덮은 봉우리 몇개가 겨우 보인다. 손에 잡힐 듯한 구름이 지리산의 속살을 모두 덮어버렸다.

비행기 안에서 보는 구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과 현실감, 하지만 풍경 자체의 비현실성이 보는 이를 압도하고 만다. 살면서 다시 못 볼 것 같은 절경이다. 무엇보다 내 다리를 움직여 이런 놀라운 풍경과 마주하고 있다. 탄성이 흘러나오고 만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넋놓고 있을 수는 없다. 잠시 사진을 한장 남기고 재빨리 안장에 올라 다시 길을 향한다. 아주 조심히 내리막을 하고 나면 정령치(5.9㎞, 7%)라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은 오르막이 또 시작된다. 성삼재에서 다 쓴 힘을 긁어모아 폭풍 페달링을 해보지만 마음뿐이다. 뒤에 확인한 구간 평속은 9.9㎞/h, 정말 거북이처럼 올랐다. 

정령치에서 내려올 때쯤 해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걱정했는데 정말 최고의 날씨다. 해와 구름의 조화가 기가 막힌 가을날씨.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고 라이딩이구나.

◇낯선 이들과의 경쟁과 협동이 주는 즐거움
하지만 태풍의 잔해들이 평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기세가 엄청나다. 출전선수가 적다 보니 대부분 구간을 혼자 달렸는데 딱 죽을 맛이다. 속도계가 북쪽과 동쪽을 가르킬 때마다 시속이 25㎞ 아래로 떨어진다.
 
그래도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들과 앞뒤로 번갈아 달리며 협동했다. 같은 목표를 위해 낯선 이들과 경쟁하고 협동하는 게 또 사이클의 묘미다. 내가 바람을 맞을 때는 힘들지만, 내 뒤에서 힘을 비축한 경쟁자가 앞으로 나와주면 또 나는 편해진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오도재(5.1㎞, 7.9%) 초입. 오도재는 경사 15% 구간의 가파른 구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악명높은 업힐이다. 8~9% 경사가 평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또 100㎞가 넘었을 때 시작되는 구간이기에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올라야 한다.
 
오도재 정상 짙은 안개가 드리운 풍경© News1
오도재 정상 짙은 안개가 드리운 풍경© News1

정령치를 지나 잠시 났던 해가 무색하게 오도재는 완전한 안갯속에 잠겨 있었다. 몇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밀도 높은 안개다. 무거운 다리를 한발 한발 내딛지만 어떤 길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길의 연속이다. 15% 안팎 경사가 계속되면서 왜 이렇게 힘든 길을 올라야 하나 화가 난다. 자욱한 안갯속에 안장 위에서 내리고 싶은 나와, 그런 자신을 달래는 나의 싸움으로 어떻게 올랐는지 모르게 오도재를 통과했다. 정상 역시 온통 안개뿐이라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다. 
 
안갯속을 조심 또 조심하며 내려오니 금방 구불구불 경치로 유명한 지안치를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평지에선 바람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바람은 누구에게나 힘든 상대다. 여럿이 달리며 힘을 비축하는 수밖에 없지만 역시나 대부분 구간을 혼자 달렸다.
 
남은 구간은 마지막 업힐인 필령(5.1㎞, 4.4%)을 포함해 40여㎞. 잠깐 잠깐 힘을 내 나를 추월하는 무리와 함께 달렸지만 결국 뒤로쳐져 다시 혼자가 됐다. 무리에서 내가 쳐지는 걸 본 한분이 "붙으세요. 안 붙으면 죽어요" 외친다. 힘들어 죽겠는데 챙겨주는 그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난다. 고마운 마음에 잠깐 바짝 힘을 내 붙었다가 쳐지고, 그러다 또 앞지르려는 무리들 뒤에 붙어 가기도 하고.

◇선택으로서의 고통이 주는 기쁨과 행복감
잠긴 다리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때, 내 앞으로 달려나가는 라이더의 등에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Pain is temporary'. 전설의 사이클리스트 랜스 암스트롱이 한 말로 알려져있다. 전체 문장을 소개하면 'Pain is temporary. Quitting lasts forever'. 고통은 잠깐이다. 하지만 포기는 영원히 남는다.

그렇다.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나와 700여명의 라이더들은 이날 고통을 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을 맛봤지만 돌아보니 세상 달콤한 것이었다. 다치지 않고, 펑크 등 기재 트러블 없이 무사 완주에 성공했다.
 
지리산 그란폰도는 '접수령'(신청자들이 몰려 대회 접수가 고개(嶺)를 오르는 것처럼 어려움을 일컫는 말)을 넘어 1500여명이 신청했지만 악천후로 절반 이상 참가를 포기했다.

이날 그란폰도 코스를 시간내 완주한 사람은 348명(그란폰도 보다 짧은 88㎞ 메디오폰도는 224명이 완주), 나는 8시간이 조금 못되는 기록으로 골인했다. 등수로 따지니 절반 보다 조금 좋은 기록이다. 여성 1등(5시간49분)과 비교하면 역시 초라하지만, 목표한 9시간을 한시간 넘게 당긴 내가 대견하다.
기자가 받은 완주증© News1
기자가 받은 완주증© News1
지리산 그란폰도 완주증, 그 종이 한장을 들고 나는 돌아간다. 종이엔 내가 지리산의 안개와 구름을 마주하며 달린 시간이 적혀있다. 7:51:33이라는 고통과 기쁨의 시간, 온전히 내 힘으로 행복을 거머쥔 시간이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행복감. 자전거가 뭐라고, 이렇게 힘들어야 하고 이렇게 좋은 것일까.

대회가 끝나고 남원시내에서 꿀맛 같은 추어탕 한그릇을 하고 돌아가는 길, 고통과 기쁨의 시간들을 위한 도전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cha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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