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김수정 대리'의 마성…출장만 나가면 수천만원 돈다발 [사건의재구성]
한국 머물던 중국 여성, 보이스피싱 조직 수거책으로 가담
전국 피해자들에 1.3억 갈취…中 도주 끝 징역 2년6개월형
- 임윤지 기자
(서울=뉴스1) 임윤지 기자 = "고객을 만나서 돈을 받아 전달해 주시면 일당을 드릴게요"
2022년 2월, 한국에 머물던 당시 25살 중국 국적 여성 L씨는 이름 모를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돈만 전해주면 된다고?'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이참에 돈을 벌 기회라 생각한 L씨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순간의 유혹은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L씨에게 접근한 건 다름 아닌 보이스피싱 조직.
"저금리 대출을 받으시려면 일정 담보금이 필요해요. 저희 직원 보낼 테니 건네주시면 됩니다."
"중앙지검 수사관입니다. 명의도용 신고 접수되셨는데, 현금 일련번호 확인해야 하니 저희 직원 만나서 현금 전달바랍니다."
보이스피싱 유인책들은 은행·카드사 심지어 수사기관인 척 수많은 피해자들을 속였다. 언제까지 현금을 갖고 나와 '김수정 대리'에게 전달하면 된다고 했다.
그 김수정 대리는 바로 L씨였다. L씨는 업무 중 '김수정 대리'라는 가명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수정 대리입니다. 보증금 5000만원 들고 오셨나요?"
도봉구 아파트, 마포구 길거리, 경기 구리의 한 호텔 앞… L씨는 전국 방방곡곡 지시받은 장소로 가서 피해자들을 만나 1000만원에서 5000만원씩 받아냈다. 이렇게 L씨가 피해자들에게서 받은 돈은 총 1억3000여만원에 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L씨의 수법은 더 대담해졌다. 피해자들의 돈을 받은 뒤 L씨는 그럴싸하게 꾸며낸 가짜 '채권회수안내서'를 피해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범죄인 걸 알면서도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거니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L씨는 한국인 금융계 직원 '김 대리'라는 가면을 쓰며 살아갔다.
L씨는 결국 경찰에 꼬리를 잡혔다. 처음에 '보이스피싱인 줄 몰랐다'고 부인하다가 중국으로 도주했다. 다시 붙잡힌 L씨는 재판에 넘겨져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됐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25일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이석재 판사는 사기·사문서위조행사 등의 혐의로 L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다수이고 피해 금액이 고액임에도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문서를 위조했을뿐더러 수사기관에서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자국으로 도주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L씨가 단순히 수거만 한 점, 실제로 취득한 이익이 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immun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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